5. 사실과 이론, 패러다임의 관계
모든 언어적 표현이 그렇다고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시에 있어서 경험의 자발적 표현과 그것의 배경에 있는 어떤 전체성의 테두리는 과학 연구의 과정에서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사실과 이론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리고 시와 과학은 유사성을 넘어 긴밀한 인식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나 과학이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경험적 사실의 세계이며, 그것에 일정한 표현을 주려는 인간의 지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직접적이든 아니면 특별한 방식으로 고안된 실험의 방식을 통하여서든 사실적 관찰을 그 토대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어떤 이론과의 관계를 통하여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사실은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이론을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사실 관찰이 이론을 수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의 출발과 종착점은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경험적 사실을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 데에 따른다. 그러나 표현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의 체계, 문화의 체계, 이론의 체계의 도움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시 또는 다른 문학적 표현이 그 자체로서, 사실에서 출발하여 경험적 현실 세계 전체를 하나의 이론 속에 또는 적어도 이해의 구조 속에 포용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히 시의 경우, 즉흥적인 행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큰 이해의 체계 속에 참여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계를 이해하거나 검증하거나 수정하는 행위가 된다. 그것을 목표하여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 경험의 표현 행위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경험적 사실을 시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계획된 의도에 관계없이, 그 구체성을 넘어가는 의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 연구의 실제에 있어서도 사실과 이론의 관계가 반드시 엄격한 체계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초의 토마스 쿤의 과학사 연구는 연구의 실천 그리고 이론의 구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패러다임이라는 생각을 일반화하였다. 이것은 시나 문학적 언어 표현에서의 사실과 일반성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패러다임은, 적어도 처음 시작에 있어서는, 우연적인 성격을 가진 연구의 사례, 사실 관찰과 이론을 한데 어울려 가진 연구의 사례가 과학 체계의 구축에 모범이 되어 이론과 실험을 발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범의 일반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은 조금 더 복잡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반드시 틀림없는 이론 체계의 정당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도 어떤 사례들은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패러다임은 이론적 정당화를 넘어서 학문적 실천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은 주로 푸코가 시사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의미와 쿤의 의미를 구별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푸코가 패러다임이라는 말 자체를 피하려 한다는 것도 지적하면서-푸코가 패러다임에 작용하는 담론 권력에 주력하는 데 대하여, 쿤은 역시 합리적 규칙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을 본격적으로 논하는 것보다도 패러다임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수도원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 같은 것은 창시자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규칙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때 그것이 반드시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의 삶은 대체로 이러한 의미에서 패러다임이 된다. 더 주의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실이든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패러다임이 개입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람의 이해나 인식 과정은 늘 패러다임을 생성하는 것이다.
한 사실을 다른 사실에 이어서 하나로 이해하고자 하면, 이 이해의 노력은 둘 사이에 공통된 요소-일반화될 수 있는 요소를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게 된다. 가령 플라톤의 예를 들어,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베 짜는 일에 비교할 때, 또는 아이들이 다른 단어들에 들어 있는 같은 음절을 인지하게 될 때, 거기에는 일반적인 범례로서의 패러다임이 끼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 짜기는 구체적인 행위이면서, 짠다는 행위로 일반화된다. 음절의 확인도 구체적인 소리가 고정될 수 있는 전형으로 옮겨서 해석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시 플라톤의 예로서, 기억되는 일을 현재에 이으려고 할 때도 무엇인가 일반적인 아이디어의 바탕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주어진 사물을 이해하려고 할 때도 이러한 일반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감각에 느껴지는 것을 이해할만한 것으로 전환하려 할 때, 일반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을 ’설명(exposition)‘으로 대상화할 때, 감각적인 것은 ‘이해될만한 것(intelligiblility)’의 수준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때 ‘감각적인 것’은 패러다임-모형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인 것이 스스로에 다시 관계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일반적인 이해의 틀 속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매개하는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 자신의 관계가 패러다임에 의하여 매개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언어 표현은 패러다임의 개입을 요구하고 이 패러다임은 잠재적으로는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수도사의 경우는 삶 자체가 패러다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적어도 그것이 삶의 규칙이 될 만큼 정형화되려면, 그러한 범례화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다른 존재에 대하여 범례가 된다. 모든 사실들은 사실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 가능성을 표현한다. 특히 이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은 그 일반적 가능성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언어 표현은 ‘이해될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적인 언어는 아주 구체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특히 강조하는 언어이다. 그 구체적인 사실의 묘사는 이해할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 있는 충동은 사실의 총체가 이해의 차원-어떤 고차적인 이성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높은 시적 야망의 경우를 말하지만, 그 야망은 경험적 사실의 가해성(可解性)을 전제하는 모든 시적 노력 속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의 경우, 구체적인 사실의 범례화는 합리적인 큰 이론에 편입됨으로서 정당화된다. 시에서 사실적 외물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그 가해성 그리고 더 나아가 사물의 존재론적 가능성 속에서 수용되거나 시사함으로써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사물의 독해가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사물의 존재는 끊임없는 사건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시는 이것을-모든 인식의 노력에 그것이 들어 있다고 하겠지만-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 특히 그 감정적 자극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어려움이 특히 증가한다. 그러면서 물론 모든 사실 인식과 표현에서의 패러다임적 성격-그러니까 그것을 초월하는 삶 전체에 대한 관계는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도 그대로 작용한다. 일단 모든 대상물은 지적인 관찰 또는 시적인 서술에서 가해적인 것으로 존재하고, 가해성은 달리도 확대될 수 있는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갖는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과 이론 그리고 패러다임이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문학에 있어서, 큰 질서와 작은 행동, 물질적 문화적 조건과 표의(表意) 행위의 자발성의 관계는 삶의 구조의 복합성을 나타낸다. 시적 표현은 자발적인 언어 행위이면서, 소리나 의미 그리고 인간 인식의 복합적 구조 속에 있다. 그리고 그 법칙적 규제 속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적 개입을 허용한다. 이 관계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학에 있어서의 이론과 사실의 관계에 흡사하다. 다만 시에 있어서 사실과 이론은 극히 부정형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사실 지각은, 거울뉴런이 시사하듯이, 객관화된 사물 인식에 일치하는 것이 아닐는지 모른다.
또는 사람이 사물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할 때, 거기에는 이데아가 작용한다. 이 이데아가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인지 또는 일관성이나 체계를 가지고 있을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사물과 이데아와의 결합은 언제나 일어나고 또 확대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사람의 삶이 개체적인 행위로 존재하면서 큰 테두리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응하다. 또는 삶의 존재론적 전체에 관계된다. 그러나 사물 지각과 그 테두리는 이성적으로 풀려질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변화 속에서 계시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되풀이 하건대, 시적 표현과 존재론적 전체의 관계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면서, 과학에 있어서의 사실과 이론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과학은 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과학도 어쩌면 자기 이해를 시도할 때, 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