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큰 이론의 매력과 쇠퇴
그러나 존재의 근본 층위에 일어나는 직관이나 아이디어의 사건 또는 과학에 있어서의 사물과 이론의 관계-이러한 것이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는 하나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부딪칠 때에 그것을 알만한 것이 되게 하는 보다 큰 설명을 찾는다.
최근의 사건을 예로 들어, “개성공단에 남아 있던 마지막 근무자들이 무사히 귀환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뉴스가 된다면, 그것은 이들이 처했던 상황, 개성의 의미, 남북한의 관계, 그 정치 체제의 차이의 이야기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 관계없이, 아무 일이 없는 상황에서 버스를 타고 개성 서울 간을 오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뉴스가 될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실이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또는 도대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의미의 구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일상적인 차원에 관계되는 이론들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전체성을 암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어떤 큰 이론들은 이러한 관점에서도 유용한 총체적인 이해의 틀이 된다.
전체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이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우주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다 중요한 큰 이론은 대체로 사회, 정치, 역사에 관련된 이론이다. 우주론보다도 이것이 중요한 것은-물론 정확히 따져서 말한다면,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지만-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지적 실천적 향방을 결정하는 데에 그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정의하는 여러 말이 있지만, 현실 실천의 관점에서, ‘정치적 존재’라는 말은 아마 가장 중요한 인간적 삶의 국면을 이야기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명해주려는 것이 사회이론이고 그것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행동적 요인을 고려하는 정치 이론이고 그것을 초월하는 대세를 말하는 것이 역사의 이론이다.
그러한 이론들은, 다시 말하여, 여러 사람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이 사람인만큼, 1)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와 행동의 전략에 일정한 기능을 가질 수 있게 하고, 2)사회적 동윈(動員)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3)사회적 인정을 위한 노력에서, 또는 그것이 조금 변형되어, 어떤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전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태극이론이나 오행설과 같은 우주론은 윤리 원칙-삼각오륜의 윤리를 정당화는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근대 사상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주로 서양에서 시작한 역사의 발전과 거기에서 파생한 여러 이론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마르크스주의이다. 그리고 그에 반대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에 비슷한 발상을 가지고 있고 또 비슷한 총체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경제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 발전론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만큼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자신의 삶과 사회 그리고 정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론 또는 이론적 분위기이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널리 이야기 된 것은 큰 이론들의 죽음이다. 이 이론의 죽음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현실적으로는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이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있었던 나라에서의 여러 정치적 억압과 비인간적 정책은 그 전에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실망을 가져왔지만, 그 죽음까지는 아니라도 쇠퇴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였다. 다른 한편으로 비슷하게 역사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이론들도 적지 않은 반론과 반증에 부딪쳤던 것이 20세기 후반의 현상이었다. 산업과 경제의 발전이 야기한 자원과 환경의 문제가 심각해진 것과 아울러 경제발전이 약속하는 풍요의 사회가 참으로 인간적 삶의 실현을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많이 생겨 난 것도 역사의 큰 이론을 쇠퇴하게 원인이 된 것이다.
문학은 반드시 이론적 추구는 아니지만 전체성에의 끌림을 버릴 수가 없는 언어 작업이다. 그리고 이 전체성은 가장 선명하게 체계화된 이론에서 발견된다. 문학은, 다시 말하건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사실 경험의 표현을 떠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바로 이 표현 작업 그것에서 전체성의 여러 구도에 참여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큰 구도의 이론들은 커다란 매력이 되기도 하고 쉬운 표현적 전략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떤 시기에 있어서 문학과 큰 이론은 편한 것만은 아닌, 공생 관계 속에 들어간다.
공산주의는 스스로의 체제가 인간의 모든 것을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시를 포함하여 문학작품은 작은 것에서나 큰 것에서나 새로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문학의 작업은 이미 있는 전체성을 목전의 것에 적용하면 그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련 혁명의 시인 마야콥스키는 ‘우리들의 행진’(1917)에서 “반란자들의 보무(步武)로 광장을 울려라/…/ 우리는 세계의 도시들을 제이의 홍수로 씻어낼 것니….” 이와 같이 혁명의 기치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물론 자연도 새로운 새로 막이 열리는 역사 속에 편입될 수 있었다. 마야콥스키는 말했다: “초원들이여, 풀로 덮여라./ 다가오는 날들을 위하여 땅을 펼치라./ 무지개여, 웅비하는 세월의 말들에 안장을 지우라.”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세계의 비전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그 나름의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래 갈 수는 없다. 사람의 시적 경험은, 그 지각 경험과 같이, 하나로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의 시에서, 마야콥스키는 “보라, 하늘도 권태에 잠겨있지 않느냐”하면서, 혁명의 열정이 세속적 삶의 권태를 없애고 세계에 활기를 가져 올 것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그러한 정열의 혁명 이데올로기의 되풀이 그것이 권태로운 것이 되고 만다. (물론 더 두려운 것은 혁명이 가져오는 공포정치였지만). 스탈린 사망 후 해빙이 시작되면서, 이 시대의 대표 시인의 한 사람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는 시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조여매려는 체제에 대한 그의 반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발그레한 얼굴의 콤소몰 거물들이 우리들 시인들에게 주먹을 내리치며 마치 밀랍(蜜蠟)을 주물듯 우리의 영혼을 그들의 모습 그대로 새로 빚어내고자 할 때,
그 말이 무섭지는 않지만, 예세닌이여! 마음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 그러나 바지 춤 추슬러 올리며, 달려 갈수는 없어, 그런 콤소몰로. --‘예세닌에게 보내는 편지’(1965)
그의 탄생 70연을 맞이하여 예프투셴토는 혁명기에도 순수한 주로 순수한 시를 썼던 예세닌을 추억하면서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시를 거부하고자 했다.
이러한 거대한 세계의 미래에 대한 비전의 흥분과 그에 따르는 환멸과 경직성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충분이 경험한 바 있다. 여기에 대한 평가가 일률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그 나름의 기능과 의의를 가지고 있지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직성이 시와 삶의 자발성을 억제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큰 비전의 흥망을 볼 때, 시의 자발성에 관계되는 전체는 어떤 고정된 이론보다도 계시로 드러날 듯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서만 살아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작은 사실적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큰 이론의 죽음은, 그것이 가져온 인간적 희생으로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겠지만, 사람의 사고와 사실의 세계-작고 큰 사실의 세계의 관계를 경직된 상태로부터 풀어 놓기 위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론 없는 세계가 쉽게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설은 이론의 죽음 그 자체도 하나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이 없다는 이론은 무의미의 유사 이론의 모든 유사 건조물을 허용한다. 물론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새로운 문학적 시도는 이론의 조각들과--거기에서 파생된 기발한 착상과 억지스러운 비유의 구조물이라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조각들은 큰 집이 무너진 다음 언어의 들에 남아 있는 폐허 같기도 하지만, 문학이 살림을 차리는데 필요한 기초 자료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구상물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다른 이론적 구조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제 스스로의 모양을 갖추지 못하는 언어 형식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