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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대입서 문·이과 구분 폐지하자

FERRIMAN 2013. 7. 25. 17:21

입력 2013.07.23 00:23 / 수정 2013.07.23 00:38
 

[시론] 대입서 문·이과 구분 폐지하자

박성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서울대가 입시에서 문과·이과 계열 구분 없이 학생이 원하는 학부·학과에 지원할 수 있도록 입시 시스템을 바꾸는 방안을 ‘서울대 법인화 이후 미래 과제’로 담은 미래교육기획위원회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다. 서울대는 문·이과 통합모집이 장기 비전이라고 밝혔지만 이 비전이 실현될 경우 고교 교육에 주는 영향이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통합모집의 1단계로 서울대는 2014학년도부터 공대 건축학과와 산업공학과에 한해 수능 인문계열 과목을 선택한 문과생이 교차지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과거 이과생의 인문계 교차지원은 있었으나 문과생에게 이공계(간호대·의료관련학과 제외) 교차지원을 허용한 것은 처음이다.

 고교 문과·이과 구분은 2002년 제7차 교육과정이 도입된 후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거의 모든 일반계 고교에선 2학년 이후 문·이과로 반을 나눠 가르친다. 대부분의 대학이 입시에서 문과는 사회탐구 과목, 이과는 과학탐구 과목의 점수를 요구하고 수학도 가형과 나형으로 분리해 각각 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의적 인재에 목말라 있는 기업의 상당수는 현재의 이러한 교육시스템이 필요한 인재를 키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6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잡코리아에 의뢰해 각 기업 인사담당자 10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 교육제도가 창조인재 육성에 적합한가’라는 질문에 ‘충분하다’는 답변이 13.7%에 불과했다. 특히 2012년 9월 매일경제신문이 전국 교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55%가 문·이과 구분 폐지에 동의했고, 32%만 현행대로 유지를 원했다. 고교 교육 현장에서도 문·이과 통합을 희망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교육시스템의 변경은 언제나 장단점이 따른다. 그러나 문·이과 통합은 단점보다 장점이 많아 보인다. 그 장점은 첫째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지식이 융합된 인재를 키울 수 있다. 이런 인재는 학문 경계를 넘나들며 창의적 사고를 하기에 유리하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성공 배경에는 기술뿐 아니라 인문학적 기반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교 문·이과 분리 교육은 21세기 융·복합 시대에 적절하지 않다. 일본과 한국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사라진 이유다.

 둘째로 고교에서 문·이과를 두루 공부하고 대입 바로 직전에 전공할 학부·학과를 선택하게 하면 잘못된 선택을 줄일 수 있다. 학생들이 청소년기의 잘못된 판단이나 부모나 교사의 강권으로 문·이과를 선택하면 대학입시에서도 전공을 잘못 선택할 가능성이 크고, 그럴 경우 직장에 취직한 뒤 적성이 맞지 않은 곳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국가적인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과학기술력이 국가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과학기술 중심으로 변하는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수학이나 과학(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등)의 기초지식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예로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려면 수준 높은 수학 실력이 필요하다. 행정고시에는 문과 출신이 대부분 합격하지만 나중에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과학기술의 기초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고교에서 문·이과 구분을 없애고 기본적인 수학이나 과학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컴퓨터나 통계학 교육을 보강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고교 교육에서 문·이과 구분 폐지는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 문·이과 구분이 폐지되지 않으면 고교에서 문·이과 구분을 먼저 포기할 수는 없다. 한국 대학 입시의 상징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입시제도를 과감하게 문·이과 구분 폐지로 나아가고 다른 대학들도 동참하기를 기대해 본다.

박성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