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과학적 사실과 시적 사실의 차이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시를 쓴 시인 백무산 씨로 하여금 이러한 초연한 관찰의 관점을 얻게 하는 것이 그 나름으로의 거대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이 거대담론은 과학이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시와 과학은 사실과 이론 또는 전체성의 예감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큰 이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마 과학과 다른 이론을 갈라놓는 것은 과학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실 집착일 것이다.
물론 사실 집착에 못지않게 과학을 규정하는 것은 그 이론지향이다. 이론이 없는 사실은 과학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과학의 이론은 사실에 의하여 끊임없이 시험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들의 퇴적 속에서 그것은 수정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론은 절대화되지 않는다. 이론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근접되어야 하면서 근접이 어려운 이상이다.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은 앞으로 이루어내야 할 것이지만, 최종 이론이 아니라도 이론은 독단론이나 교조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실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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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창 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 |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시도 사실적 경험을 그 뿌리로 한다. 그 경험은 물론 과학적인 사실의 관찰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총체적인 교환-감정과 의지 특히 정열을 포함하는 실존적 경험이다. 그리고 이에 바탕이 되는 것은 있는 모든 것 또는 존재이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비하면 과학은 일정한 관점에서 단순화된 사실만을 주시한다.)
과학적 사실과 시적 사실의 차이에 두드러진 것은 시적 사실이 감정으로 접근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사건 그리고 상황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은 세계에 실존 전체로서 임하는 인간 존재의 특성의 한 증표이다. 궁극적으로 바탕이 되는 것은 공감되고 지각되는 사실이다. 지각하는 사실에 근거가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다시 과학과 공통점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큰 이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시의 영감이 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시나 과학이나 사실에-시에 역점을 두고 말한다면, 특히 지각되는 사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백무산 시인은 우리의 시 전통에서 과학을 널리 참고하여 그것을 삶에 대한 시적인 성찰에 적용한 매우 드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자 혁명의 시인이었지만, 그리고 그에 기초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아직도 지니고 있지만, 작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는 과학의 관점으로 그 한계를 벗어났다는 또는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 과학적 관점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호사벽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개인적인 삶-또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깊은 반성에 이어져 있다.
그의 시에는 “진화론”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지만, “잃어버린 새”는 진화론의 관점을 빌려 인간과 새의 생명체로서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이 시는 작은 새를 손으로 만지면서, 그 특징을 직접 감지한 경험을 기록한다. 거기에서 그가 확인하는 것은 새의 가벼운 무게와 화려한 날개와 예민한 귀와 눈과 소리 내는 능력과 비행 능력 등이다. 심장을 만져보는 부분은 이러한 감지가 체감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두려움에 떠는 새의 심장을 만져본다 그 야성의 심장에 손이 닿자 나의 온몸이 경련처럼 떨린다.
대체로 감지하는 사항들은 지각되는 사실로 기록되지만, 시인은 그것을 인간적인 감성에 중첩하여 말하기도 한다. 그는 만지고 있는 새가 “사랑에 아파하고 집을 찾아오는 기쁨을 알고/ 무리를 위해 희생을 아는 새”이고, 그러한 새의 “비상의 뜨거움을 아는 사소한 부피가 경이롭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인 감정이입보다도 그의 경이감은 절제된 단순한 진화론적 관찰에 요약된다.
저 낯선 것과 내가 같은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 앞에 나는 말을 잃는다 얼마나 먼 세월 조금씩 조금씩 딴 길을 걸어서 어떻게 우리가 만난 것일까
시의 끝은 인간과 새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걸어 다시 만나게 된 두 생명체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럼으로 하여 인간에도 새의 속성이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회복하거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시인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내 몸에 새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까 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
‘그 모든 가장자리들’은 인간을 지질학의 긴 관점에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백 시인은 “진화론”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역사의 결과가 자신이라는 것, 진화의 과정 속에서 변화하면서도 지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잊고 컴퓨터의 데이터처럼 단편화된 정보의 집합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단절되고 단편화된 존재의 인간의 진화를 되돌아보고 그 어지러우면서도 진실되어 보이는 원초의 인간을 회상하고자 하는 시가 “그 모든 가장자리들”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 사는 곳에 태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뒤집고 불덩이 화산이 솟고 사막과 빙하가 있어 나는 고맙다 나는 종종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끔찍할까 지구는 얼마나 형편없는 별일까 생각한다네.
지구에 일어났던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재난들은 사람에게 기이한 안도감을 준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사람이 지어놓은 도시에 닥쳐오는 거대한 자연의 위력의 시위는 마음을 흥분케 하는 사건이다. 그러면서 인간 존재의 깊이를 알게 하여 그것을 안정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지구의 가장자리가 얼어붙고 들끓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네/ 도심에 광야를 펼쳐 놓은 비바람 천둥에도 두근거리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역사는 인간 존재에 무게를 더해줄 것으로 시인은 생각한다. 그것으로 볼 때, 인간은 “한두 세기만에 허접한 재료로 발명된” 허무한 존재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걸어 온 모든 길을 다 걸어온 인간이 어떤 인간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반성에 기초하여 인간의 귀중함을 더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다른 인간을 “그리운” 존재가 되게 한다. 시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아직 별동별이 떨어지고 아무 것도 길들여지지 않은 땅에 / 먼 길 걸어 이제 막 당도한 인간이 더러 살고 있을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가 “인간의 가장자리 사회의 가장자리”로 가는 것은 그 곳에 아직도 원초적인 상태의 인간의 삶, “십만 년을 소급한” 삶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