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한국연구재단이 기획한 석학인문강좌가 10일(토)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명 인문학자의 강의를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
백승균 계명대학 목요철학원장은 ‘사람을 자연 이상으로 보는 철학- 탈중심성의 생물학적 사유’라는 주제로 그의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다음은 백 원장이 오늘날 철학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눈높이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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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균 원장 ⓒScience Times | ▲상식적 판단=상식적 판단이란 돈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며, 남자는 용감하고 여자는 겁이 많으며, 눈물이 많은 사람은 정이 많고 눈물이 없는 사람은 매정하다는 등의 판단이다.
FIFA순위 1위는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잘 하고, 2위는 그 다음이며, 정구는 힘이 많이 드는 운동이고,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 등이라고 단정해버리는 것도 상식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사실 자체에 대한 과학적 물음이나 합리적 사고가 없기 때문이다.
왜 아침산책은 좋고 나쁘지 않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그렇다고만 믿고 따른다. 그래서 사자는 맹수이기는 하나 우아한 동물이어서 좋기만 하고, 하이에나는 흉측해서 나쁘기만 하다는 선입견까지 낳는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일상생활에만 몰두하여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 대한 과학적 합리성을 놓치고 만다. 이러한 판단이 상식적 판단이고, 여기에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이면의 진리가 은폐되었기 때문에 천동설을 뒤엎을 수가 없었다.
▲과학적 판단=과학적 판단은 일상생활 속에서 감성적으로만 경험하는 판단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이성적 사리에 따라 예단까지 할 수 있는 판단이다. 2010년 월드컵경기에서 한국이 완벽한 게임으로 그리스를 눌렀다는 것은 단순한 파워만이 아니라 기술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승리였다.
이때 기술이란 과학을 의미하고 조직화를 의미한다. 소위 세트플레이다. 이것은 고도의 과학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일상적 삶도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틀이 있고 계획이 있는 것이라면, 하물며 스포츠경기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직력 없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간단한 등산을 한다고 해도 먼저 산행지를 선택해야 하고 등산로까지 확인하면서 등산계획을 세워야 한다. 등산계획을 세워야 하는 데도 첫째로는 그 산에 대한 자료를 수집 검토해야 한다.
그 날의 기상예보를 알아보아야 하며, 또한 리더를 정하고 각자의 임무를 분담해야 하는가 하면 식사, 휴식, 잠자리 등의 계획도 짜서 사전에 준비를 마쳐야 하고, 필요한 비용을 산출하여 예산을 세우며, 나아가서는 예비회의를 통하여 사전계획을 재확인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등산장비를 마련하는 일이다. 등산복과 등산화는 기본이고 등산용품 일체를 준비하는 일과 배낭을 꾸리는 일, 나아가 여름과 겨울의 산행준비 그리고 돌발 사고를 위한 산행수칙을 숙지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학교교육을 통하여 합리적 생활태도나 이성적 가치판단 혹은 동일성의 논리에 따른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의 실용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 법칙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실의 행방을 유추하여 예측할 수 있고 예단할 수 있다.
수학적 논리의 지식이 과학적 합리성을 낳고 과학적 합리성이 실천적인 기술을 가능토록 함으로써 오늘날의 IT기술을 통하여 정보사회까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왜 그러하냐는 근거에 대해 되묻는 자기성찰이나 자기반성이라는 것이 없다.
▲철학적 판단=과학적 판단도 인간존재의 본래성을 다 짚어낼 수 없다면, 더욱 구체적으로는 어떤 행사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했다고 해도 행사 자체의 목적이나 의미내용을 짚고 있지 않다면 완벽한 행사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사의 목적이나 의미내용이 그 행사를 주관하는 자기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행사의 본질이 훼손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과학적 판단 이상의 판단, 즉 철학적 판단이 필요하다.
철학적 판단은 과학적 보편타당성을 넘어 사태 자체와 혼연일체가 되도록 한다. 사태와 혼연일체가 되는 판단은 살벌한 타향살이에서가 아니라 훈훈한 고향에서 내리는 결단이다. 고향이란 자기 자신이 태어난 곳이고 자라난 곳이다. 그러므로 고향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고장이기도 하고 바로 자기이고 자신의 본래성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상식적 판단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상대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객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판단이다. 과학적 판단은 객관적 법칙에 근거하는 원리원칙에 따라 사태의 진행을 예견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판단이다.
이로써 과학은 구체적인 지식획득의 가능성을 보장하면서 합리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따라서 철학적 주장의 의미나 해석을 실험과 검증으로 확신케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판단의 한계는 그 자체의 법칙성 때문에 근원적인 탐구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는데 있다.
철학적 사유는 과학의 원리나 법칙을 하나로 통일시켜 원리의 원리까지를 추리해 냄으로써 과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체의 본래성에 이르게 한다. 이로써 철학적 판단은 일상적 삶의 판단과 과학적 판단을 내포하면서도 그를 초월하는 합리성의 근거와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마련하여 근원성까지를 밝혀내려고 한다.
신화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마오리족과 손가락 3개=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수호신 티키는 사람의 형상을 손가락 3개로만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의 검지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生)을 의미하고, 두 번째의 중지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평생을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살아간다는 삶을 의미하며, 그리고 세 번째의 무명지는 한평생의 삶을 다 살고 언젠가는 이승을 떠난다는 죽음(死)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생과 삶, 그리고 사 이외 무엇을 더 표현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다시 말하면 본래의 인간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원초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생과 사는 인간 삶의 양극으로서 생은 탄생이어서 기쁨이고, 사는 이별이어서 슬픔이다. 사실 인간의 삶이 몸통으로서 중심축을 이루고, 그 양극에서 생과 사가 쉼 없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수호신 티키는 자신의 품에다 생과 사를 동시에 함께 품고 있다. 이런 생과 사의 진폭에서 자유로울 삶이 없다면 인간의 삶에는 생과 사의 연속성만이 있을 뿐이다. 생사의 이어짐 속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교차한다. 생사가 교차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쁨도, 절대적은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슬픔도 가고 기쁨도 간다.
그러나 기쁨과 슬픔 속에 남아 이어지는 매듭은 언제나 삶으로서 존재한다. 삶은 자신의 생사를 스스로 재생산한다. 삶치고 고단하지 않는 삶도 없고, 삶치고 고단하기만 한 삶도 없다. 삶 자체야말로 생과 사를 둘로 가지나 생과 사는 그 자체로서는 하나이다.
▲ 남미 잉카인들의 신화=신화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이나 신을 중심으로 한 전래적인 인간의 설화로서 세계의 발생이나 인간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의 삶은 왜 이렇게 고되고 힘이 드는가?
남미 잉카 문명권에서 인간의 신화는 아주 직접적이고 적나라하다. 신들은 인간을 세 번씩이나 애를 써서 어렵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진흙인간은 텁텁하고 둔하며 게으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신들은 다시 두 번째로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가지고 아주 늘씬하고 매끈한 나무인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들어 놓고 보니 거칠고 딱딱하여 심술궂게까지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모여 모두 없애버리기로 의논한 후 나무인간들을 마구 부셔버리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민첩한 몇몇의 나무인간들은 급히 숲으로 도망하여 현재의 원숭이가 되었다. 지친 신들은 하는 수 없이 세 번째로 정성을 들여 섬세하게 반죽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아주 부드럽고 유연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리해도 너무나 영리하여 교활하고 민첩할 뿐만 아니라 간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들은 이제 인간을 더 이상 새로 만들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제멋대로 살도록 내둬버렸다. 그러면서도 간사한 반죽인간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걱정이 되어 그들의 두뇌활동을 무한정하게 풀어주지 않고 불투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 그리스 로마인들의 신화=어느 날 근심의 여신인 쿠라(Cura, cure,care)가 조용히 흘러내리는 시냇물 가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맥 놓고 앉아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진흙덩이를 모아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형상은 그냥 흙 그대로 있을 뿐 움직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아예 처음부터 숨은 쉬지도 않았다. 스스로 숨도 쉬면서 살아 움직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주피터가 쿠라에게 다가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쿠라가 그에게 이놈의 코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를 간청하자 그는 기꺼이 청을 들어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했다. 그를 살려놓고 주피터는 내가 그에게 생명을 주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들었으니 자신의 것이라고 우겼다.
쿠라도 자기 손으로 공들여 만든 형상이라면서 거칠게 항의했다. 두 신들의 다툼을 옆에서 보고 있던 땅의 여신 텔루스(Tellus)가 달려왔다. 그는 내 품속인 흙에서 태어났으니 당신 것들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싸움판이 벌어지자 주피터는 판정관인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에게로 가 판결을 내려주도록 간청했다. 그가 판결하여 가로되 “모두 공평하게 제 몫을 찾도록 해주겠소. 주피터 당신은 그가 죽어 생명을 다하면 그의 영혼을 가져가면 될 것이고, 텔루스 당신은 그가 죽으면 그의 해골(시체)을 다시 찾아 가져가면 당신의 몫을 차지하면 될 것이요”
이어서 사투르누스는 “그러나 어미인 쿠라는 그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를 맡아 돌봐야 할 것이다. 그 놈이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당신처럼 늘 근심걱정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운명의 법정싸움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끝이 났다. ‘흙’(humus)으로 만들어진 이 형상물은 이로부터 ‘인간’(homo)으로 불리게 됐다. 그 이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살아생전에는 근심걱정 속에 살아야 하며, 죽어서는 다시 대지의 흙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영혼으로 남아 살아야 했다.
▲ 우리의 단군신화=우리의 신화는 건국신화로서 단군신화, 고구려의 주몽신화, 신라의 박혁거세신화, 가락국의 김수로왕신화, 고려의 왕건신화 등이 있으나, 이중 단군신화가 으뜸이다. 천제 환인(桓因)의 서자인 환웅(桓雄)이 천하를 다스리려 천부인 3개(단검•거울•옥)와 무리 3천을 데리고 태백산정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나라를 열고 다스렸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한 굴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다. 환웅이 그들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알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되리라고 했다. 곰은 여자가 됐으나 호랑이는 이를 참지 못했다.
여자가 된 곰은 혼인할 짝을 찾기 위해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어 환웅이 화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 여기에서 한국인의 생사관이 나타난다.
사람다운 사람과 삶다운 삶을 1908년 동안이나 산 단군은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 천신(天神)이 되지 아니하고, 산으로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어 지금도 살아있다고 함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고, 아니 죽어서도 살아가는 한국인의 성육신(成肉身)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육신이란 신적인 존재가 인간의 육체 안으로 들어와서 인간 가운데 머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성육신하는 방식은 ‘산의 사람’(人+山=仙)으로서 ‘신선’이 되어 죽지 않고, 산에서 영원히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가 천손(天孫)이기는 하지만, 웅녀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유한하여 고통스럽게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이란 그냥 헛된 허무가 아니고 또 다른 하나의 삶의 형태임으로 죽음 역시 삶처럼 존귀하고 존엄하게 된다.
동서양이라는 지역이나 인종과는 관계없이 모든 신화의 공통점은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로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불완전성을 통해서 완전성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인간적 유한성의 극대화로서 초월자를 내재화할 수 있게 된다.
결론을 내리자면 특히 인간의 철학 없이는 인간 삶의 경험이론이 불가능하고 자연철학 없이는 인간의 철학이 불가능하다. 정신과학은 철학적 인간학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연을 정신화하고 정신을 자연화하여 일종의 유기체적 선험이론으로서 ‘인간의 철학’을 이룩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완벽하게 꽉 짜인 인간철학의 논리적 체계로 인해 자유 분망한 인문학적 구상력과 상상력이 자리할 곳은 그렇게 여유롭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를 생각하는 인문학은 사람을 근거로는 하되 사람을 떠나 사람다움을 지향해야 하는 학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