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시적 지각과 과학적 원근법
자연과학의 원근법을 도입하는 것은 시의 눈을 보다 넓은 데로 여는 일이다. 주변의 세부에 주의하면서, 마음을 보다 넓은 세계에서 열리게 하는 것-이러한 시적 체험의 핵심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과학에서 발견되는 멀고 가까운 사물의 구도를 시에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시적 지각을 과학적인 원근법으로 넓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선환 씨나 백무산 씨는 매우 중요한 시적 발견을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적 원근법이 모든 표현에서 그대로 해당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마 그것에 지나치게 또 자주 의존하게 되면 곧 그것은 상투적 공식이 되어 호소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문학이나 시의 호소력은 어디까지나 자발성에 있다. 주어진 사물에 집중하는 것은 자발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사물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체험하는 지각의 삶은 무한하다. 이 무한함이 자발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사물의 지각적 체험-감흥을 주는 지각적 체험을 기술함에 있어서 사실과 그 배경의 상호 연결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연결의 신선함이 자발성을 다시 보장한다. 과학에 있어서의 사실과 이론의 관계에 비슷한 얼크러짐은 그대로 타당성을 갖는다. 다만,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시에서 말하여지는 사실에서는 그에 관련하여 이론 또는 보다 큰 배경을 정확히 지적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앞에서 꽃을 말하는 시들을 인용하였고 이것들이 보다 큰 의미의 테두리 안에 자리하게 되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그것이 식물분류학을 통해서 보다 큰 의미의 구조에 편입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단순히 꽃을 그 자체로 그에 한정하여 보여주려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시인은 꽃의 의미를 말하려고 한다. 이 의미를 말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것이 우리 개인에게 무슨 뜻을 가졌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앞의 시 구절들에서, 시인은 수선화가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하늘을 나는 애닯은 마음”이라고 또, 그에 비슷하게 꽃은 “꺼질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아름다운 정적(靜寂)”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꽃을 그 자체로 실감나게 그려 내는 이미지라기보다는 식물과 심리의 중복을 통하여 심리를 설명하면서 꽃의 속성을 추측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환기된 이미지들은 주로 심리 상태를 형상화한다. 여기에 비쳐지는 심리는 거의 상투적인 고고함이다. 그리하여 묘사는 상투적인 것에 가까이 간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완전히 억지스럽고 일방적인 의미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의 사물들은 인간 심리에 대한 유추적인 언어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식물 자체의 존재 방식에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끌어내는 교훈이나 우의(寓意)가 발언의 요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 안에서 감지하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포착한다. (그 존재방식은 식물학적 분석을 넘어가 그러한 분석까지도 포괄하는 존재론적 바탕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많은 시에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관적인 감정, 의미, 의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동원되는 사물의 언어 사이에는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사물을 말하면서도 너무 쉬운 우화화(寓話化)가 중요해지거나 상습화되면, 시는 대체로 시적 호소력을 잃어버린다. 이것을 피하는 방법의 하나는 사물에 역점을 두는 것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 파악된다고 하여도 대체로 인간적 의미의 애매성 속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물도 그러하고 또 그에 대한 지각이 인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그러하고, 사물이 직절적(直切的)으로 파악되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단순화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될 때이다. 물론 이미지는 다시 상징과 우의의 담지자가 되지만, 이미지의 영상적 성격 자체만이 강조될 때, 그것은 물 자체의 느낌을 준다. 이것이 20세기 영미의 이미지즘이 발견한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되풀이 하건대, 이미지에 역점을 두는 수사법에서도, 이미지가 단순히 시각적 또는 다른 감각적 영상을 넘어 다른 함축을 가지는 것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또 그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면,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근본적 기능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결과가 된다. 이미지화된 사실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통하여 보다 큰 의미의 구조로 확대된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가장 뚜렷한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것은 정지용에 있어서이다.
薔薇꽃처럼 곱게 피어가는 화로에 숯불, 立春 때 밤은 마른 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石榴 열매를 쪼기어 紅寶石 같은 알을 한 알 두 알 맛보노니....
이것은 ‘석류’라는 시에서 석류를 묘사한 것인데, 여기에서 석류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묘사한 것은 그것을 홍보석에 비유한 부분이다. 이러한 비유는 단순히 시각적인 효과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보석의 비유는 이미 그것이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첫 연은 다른 비유적 묘사들로 시작한다. 이 부분의 묘사 전반은 앞으로 석류가 등장하게 될 일정한 상황을 가리킨다.
시인은 지금 화로 가에 앉아 있다. 화로에는 숯불이 피어난다. 숯불이 피어나는 것은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에 비교된다. (이것은 다시 껍질을 깨고 집어내는 석류에 대한 아날로지가 된다.) 검은 바탕의 숯에서 피어나는 꽃이 장미에 비슷하다는 것은 검은 데에서 피어나는 그와 반대되는 색깔 또는 반드시 아름답다고 만은 할 수 없는 바탕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검은 숯이 추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높고 낮음이 있는 순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순환은 겨울에서 입춘으로 옮겨오는 계절에서, 그리고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마른 풀 사르는 냄새의 교차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 또는 비교들은 사물에 대한 묘사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시인의 평가나 태도를 들어 내준다.
이러한 평가의 심리적 근거는 위의 인용에 이어지는 시련들에서 설명된다.
透明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ㅅ달, 우리들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여기의 “조그마한 이야기”는 시인의 연사(戀事)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성공한 것을 말하는지 실패한 것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체로는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시인이 “시름”을 가지는 것은 그로 인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시름은 시름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름은 무지개에 비교된다. 그리고 바로 전에 “투명한 옛 생각”이라는 언급이 있다. 이러한 연결로 미루어 실패한 연사는 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결정(結晶)된다. 그리하여 수심으로 흐려지는 마음 속에서 그것은 밝은 추억, 긍붕어처럼 움직이는 귀중한 옛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면, “석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 시적 기술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체험에 대한 일정한 해석을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조금 무리스러운 느낌을 주면서도-그러나 일제하라는 것을 참작할 때 있을 수 있는 비유로서-더 확대된 인간사에 적용된다. 위의 인용에 이어 시인은, 그가 “작은 아씨,” “가녀린 동무”라고 부르는 여성의 모습을 회상한 다음, 시의 끝에서 말한다.
아아 석류 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新羅 千年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지난 연사가 어두운 시간들을 지난 다음 보석과 같이 빛나는 추억이 되듯이, 이미 사라진 역사도 일정한 시간을 지나면 아름다운 역사적 업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일단의 비유적 도약을 허용한다면, 일제하의 암흑기도 다시 아름다운 시대로 변화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주목할 것은 역사적 영고성쇠에 대한 비유 또는 기억 속에 일어나는 사실이나 사건의 변용에 대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영상적 비유가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연상을 가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움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좋은 시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
여러 공식적인 찬가나 교가-우뚝 솟은 뫼, 도도히 흐르는 강물, 정기. 정신 등을 말하는 교가와 같은 것이 좋은 시가 되지 않는 것도 이에 관계된다. 정지용의 이미지에도 교훈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미지는 단순화된 의미로 흡수되지 아니한다. 우리는 사물들의 복합적 성격이 상당 정도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이미지들이 지니고 있는 시각적이고 미각적인 측면으로 인한 것이다. 석류가 홍보석같다든가, 그것을 맛본다는 진술도 그러하지만, “알알이”와 같은 표현도 석류의 성질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감각적인 요소들은 이미지를 추상화된 의미에로의 흡수를 어렵게 한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각적 체험에 대하여 충실성을 지니고 있는 이미지들은 상투적 일반화를 넘어가는 사물의 테두리--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 위에서 시사한바와 같이, 다른 언어 진술이나 마찬가지로 시적 언어도 그것을 포괄하는 큰 테두리를 필요로 한다. 이 테두리는 추상적 진술들의 체계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사실들의 연쇄가 암시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시공간, 부분적이면서 보다 넓은 데로 열리는 시공간-과장하여 말하건대, 존재론적 바탕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