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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천지인 속에 과학 인문학 담겼다.

FERRIMAN 2013. 8. 26. 20:39


천지인 속에 과학·인문학 담겼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2013년 08월 26일(월)

삼각뿔의 전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팽이처럼 꼭지점이 끊임없이 돌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본래 마땅히 되어야 할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생성의 결백성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백승균 계명대학 목요철학원 원장  ⓒScience Times
인문학은 변화하는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 시대를 역행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가장 역동적으로 살아가면서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도 새로운 삶을 꿈꾸는 그런 희망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한국연구재단이 기획한 석학인문강좌가 24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대강당에서 열렸다. 백승균 계명대학 목요철학원 원장의 ‘인간 삶의 철학으로서 인문학’ 강좌 마지막 4번째 강의였다.

이날 강의는 종합토론으로 마무리됐다. 강영안 서강대 교수의 사회로 김용일 계명대학 부총장과 김진 울산대학 교수가 토론에 참가했으며 청중들도 참여했다. 다음은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진 이날 토론을 요약한 내용이다.

“백 원장의 철학은 생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되가지는 영원 불변한 자기됨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또한 생성의 논리는 영원한 운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원불변과 영원한 운동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김용일 부총장)

질문의 요지는 아마도 내가 철학의 중심을 존재에다 설정하고 있다기보다 생성에다 설정하고 있다면 생성의 철학에도 어떤 하나의 논리적인 틀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틀이 역으로 생성철학의 발목을 잡는 격이 되지 않겠느냐는 내용인 것으로 판단된다.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으로 생각된다. 먼저 존재와 생성의 관계는 두부를 잘라 가르듯 양분하여 전자는 존재이고, 후자는 생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태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느냐 혹은 생성론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거기에 대한 대처 안이 달라지고, 따라서 사람의 가치관도 달라질 수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정지와 안정의 논리가 우선이고, 후자의 관점에서는 운동과 변화의 논리가 우선이다. 앞의 논리는 형식논리로 정리되고, 뒤의 논리는 변증논리로 마무리 된다. 세상만사가 다 변하는 것이라면, 이는 운동의 논리에 해당된다.

이런 변증논리를 완성한 철학자는 헤겔이었다. 그는 정반합(正反合)이라는 틀을 가지고 부와 모, 그리고 자식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정당화했고,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소위 양적 변증법의 시대를 열었다.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철학자가 키에르케고르다. 그 역시 철학의 대상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아니라는 데는 헤겔과 괘를 같이했다. 그러나 자연 대신에 ‘사람’에다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사람이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실존적 한 개체였다.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정반합의 합만이 한정 없이 모아지는 양적 변증법이 아니었다.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개체적 인간으로, 개체적 인간으로부터 자아로, 자아로부터 나 자신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다시 나의 실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질적 변증법이었다.

“현재 우리는 이미 아날로그 시대를 벗어나서 디지털시대로 접어들었다.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고 결혼이라는 제도가 거부되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 유전자지도가 해독되었고, 심지어 인간이 복제될 수도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를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찾아가는 그런 존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김용일 부총장)

▲ 김용일 계명대학 부총장  ⓒScience Times
김 교수의 질문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디지털시대에서 인간이 인간이기를 고집한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라는 생각인 것 같다. .

두 번째는 과학의 발전 속도와는 별도로 인문학자들은 자연보존의 당위성만을 주장할 뿐 환경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일 수 있으며, 그러한 역할이 바로 개인 스스로가 발전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내용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디지털시대라고 해서 사람 자신이 디지털화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향은 받을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화된 사회 속에서 사람이 생존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이기를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 대신에 오히려 자기존재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가령 인문학이 직접 공산물을 생산할 수는 없다고 해도 생산물에 인문학적 내용을 담을 수는 있다. 이처럼 인문학의 역할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인문학 자체가 실천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 원장은 지난 강의에서 우리의 전통철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天地人사상이 서양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면 한다.” (김진 교수)

어떻게 본다면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 우리의 동양사상을 서양의 과학적 전문지식의 개념과 100% 일치시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처음부터 잘못된 비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동양의 포괄적 사고가 서양의 엄밀한 과학적 사고를 그대로 대신한다고는 할 수 는 없다. 동양에서의 천(天)이 곧 서양의 과학적 전문지식으로서 천문학, 혹은 천체물리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동일선상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의 과학은 17~18세기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동양의 천이라는 개념은 이미 인도와 중국에서 기원전 3000년 내지 2000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천을 자연과학의 개념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조동일 교수도 이미 ‘인문학문의 사명, 1997’이라는 저서를 통해 天地人의 천에 해당하는 학문을 천문학(天文學), 즉 자연학문, 지에 해당하는 학문을 지문학(地文學), 사회학문, 그리고 인에 해당하는 학문을 인문학문(人文學文)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의 이러한 지적은 천지인이 곧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조 교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며 이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백 원장은 세 번째 강의에서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디지털 사회에서도 인문학적 사유는 우리에게 인간성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다소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인간성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메시지가 없었다”. (김진 교수)

▲ 김진 울산대학 교수  ⓒScience Times
그래서 아마 이런 질문도 될 것 같다. “디지털시대에서도 대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의 전통교육의 역사를 보면 먼저 서당교육이 있었다. 다시 이어 학교교육이 우리사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디지털시대가 되어 학교교육이 가상교육, 혹은 영상교육으로부터 밀려나 디지털교육만이 지고의 것인 양 최첨단에서 칼날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잠시만 우리자신으로 되돌아와서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짚어보면 해결책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이미 우리가 살아온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당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벼슬길이 아니라 인간교육에 있었다. 학교교육 역시 인성교육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따라서 영상을 통한 교육인 디지털교육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서당교육은 낡은 교육이고 가상교육은 최첨단의 교육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게 된다. 어떤 시대, 어떤 교육이든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본래의 사람됨을 위한 인간성 실현의 교육이었다. 다만 시대에 따라, 혹은 지역에 따라 교육의 양식이나 방식은 달라져 왔으나 교육의 목적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기원전 500년경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혹은 묵자가,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붓다가,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가,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아에서부터 예레미아가, 그리스에서는 호머,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혹은 플라톤 등이 철학을 설파했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내딛지 못한 채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심지어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를 거쳐 이제는 탈역사시대에서 우리가 산다고 한다. 그러나 400만년 동안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DNA를 가진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티브 잡스는 다양한 사고의 출발점이라는 차원에서 인문학도 돈이 된다고 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자살률이 급증하며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방지책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 (청중 질문)

조선조 말의 일제강점기, 해방, 6. 25동란 등으로 우리전통사회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는 동안 계층 간의 갈등도 고조됐고 또한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따뜻한 신뢰의 사회는 이룩하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자기목적만을 달성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이 팽배해졌다.

이제 우리사회 전체가 차분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팔자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이제 ‘사람팔자 알 수 있는 차분한 사회’를 지향할 때 자살률도 다소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인문학적 사유도 필요하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3.08.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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