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사이언스타임즈] 컴퓨터와 과학

FERRIMAN 2016. 9. 23.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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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야, 화학도 부탁해~

강석기의 과학에세이 187

과학에세이
 

지난 봄 구글의 기계학습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바둑 최고수인 이세돌 9단을 꺾은 뒤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컴퓨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다. 최근 가천대 길병원이 또 다른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IBM의 왓슨과 손잡고 암진단의 정확성을 더 높이기로 했다고 발표한 뒤 반응을 봐도 ‘우려’ 보다는 ‘기대’쪽인 것 같다.

사실 과학분야는 이미 컴퓨터에게 많은 걸 의존하고 있다. 실험이 복잡해지고 나오는 데이터 양도 엄청나기 때문에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일이 진전되지 않는다. 컴퓨터 작업의 꽃은 바로 시뮬레이션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덕분에 우리는 초기 태양계의 지구에서 달이 생기는 과정을 시나리오별로 시각화해 볼 수도 있다.

화학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각종 유리기구가 복잡하게 연결된 장치에 이런 저런 시료를 넣고 반응시킨 뒤 화합물을 정제하고 분석하는 과정이 루틴하게 반복되던 시대는 지났다. 물론 화학자들은 여전히 이런 일을 하지만 컴퓨터와 함께 하는 작업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술지 ‘네이처’ 9월 8일 자에 실린 논문도 이런 작업의 결과로, 컴퓨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었을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양귀비에서 얻는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위 가운데)이 신경계의 수용체(μOR)에 달라붙으면 수용체가 구조가 바뀌면서 Gi/o란 분자와 상호작용을 해 진통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구조가 바뀐 수용체는 베타-아레스틴과도 상호작용을 해 각종 부작용이 생긴다(위 오른쪽). 2012년 X선 회절법으로 수용체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지면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수용체에 작용하는 분자를 찾는 연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수용체가 Gi/o하고만 상호작용하게 구조를 바꾸는 약물을 찾는데 성공했다(아래).  ⓒ 네이처

양귀비에서 얻는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위 가운데)이 신경계의 수용체(μOR)에 달라붙으면 수용체가 구조가 바뀌면서 Gi/o란 분자와 상호작용을 해 진통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구조가 바뀐 수용체는 베타-아레스틴과도 상호작용을 해 각종 부작용이 생긴다(위 오른쪽). 2012년 X선 회절법으로 수용체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지면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수용체에 작용하는 분자를 찾는 연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수용체가 Gi/o하고만 상호작용하게 구조를 바꾸는 약물을 찾는데 성공했다(아래). ⓒ 네이처

300만 개 분자에서 2500개 추려내

미국 스탠퍼드대 브라이언 코빌카 교수팀을 주축으로 한 공동연구팀은 약효는 뛰어나지만 부작용도 큰 아편계 진통제를 대신할 수 있는 약물 후보를 찾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는데, 후보를 찾기 위해 시뮬레이션한 분자가 무려 300만 가지가 넘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실제 분자로 실제 실험실에서 비슷한 테스트를 해 후보 물질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면 전 세계 화학자들이 다 달라붙어도 이번 세기 안에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연구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편계 진통제의 작동 메커니즘을 알아야 한다. 양귀비에서 얻는 아편이 마약이나 진통제로 쓰인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19세기가 돼서야 모르핀이라는 분자가 주성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르핀은 골격이 탄소 17개로 이뤄진 분자로 화학자들은 1952년 합성에 성공했다.

그 뒤 진통효과는 모르핀과 비슷하면서도 부작용은 적은 약물을 만드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졌다. 모르핀은 의존성 외에도 심각한 호흡저하와 변비 등의 부작용이 있다. 화학자들은 모르핀의 골격을 바탕으로 변형한 다양한 분자를 만들어 테스트를 했고 그 결과 트라마돌 같은 약물이 나왔지만 부작용이 적은 대신 약효도 떨어졌다.

그런데 지난 2012년 신경계에서 아편류 진통제들이 달라붙는 수용체 분자의 3차원 구조가 X선 회절법으로 밝혀지면서 연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즉 모르핀이 수용체에 붙으면 수용체 분자의 구조가 바뀌면서 Gi/o란 분자와 상호작용을 하면 진통효과가 나오고 베타-아레스틴이란 분자와 상호작용을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수용체에 달라붙어 Gi/o하고만 상호작용할 수 있게 수용체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분자를 찾으면 된다.

바로 이번에 연구자들이 해낸 일이다. 연구자들은 분자가 수용체에 달라붙는지, 그럴 경우 바뀐 수용체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직접 하는 대신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맡겼다. 컴퓨터는 300만 가지가 넘는 분자들에 대해 시뮬레이션 작업을 수행했고 가능성이 있는 후보 2500개를 추렸다. 연구자들은 여러 사항을 고려해 이 가운데 실제 실험을 할 23개를 골랐다. 그리고 동물실험을 통해 기존 모르핀 수준의 약효를 지니면서도 부작용은 거의 없는 ‘화합물12’를 건졌다. 그리고 화합물12의 구조를 살짝 바꾼 ‘PZM21’로 본격적인 실험을 진행했고 그 결과를 이번 논문에 실었다.

PZM21의 구조를 보면 모르핀과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따라서 모르핀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약물을 찾는 기존의 방식을 썼을 경우 이런 구조의 분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계산력으로 수많은 분자에 대해 ‘단순무식하게’ 시뮬레이션을 수행한 컴퓨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아무튼 생쥐를 대상으로 한 동물실험 결과를 보면 PZM21은 중추신경계에 분포한 수용체에 작용해 뛰어난 진통효과를 보이면서도 호흡저하를 유발하지 않았고 변비 증상도 덜했다. 그리고 의존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인터넷에서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도 나와있다. 이제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가상의 공간에서 화학실험을 할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저작권자 2016.09.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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