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장르 개척하는 ‘로봇 아티스트’
로봇이 바꾸는 세상(6) 예술 로봇
시몬은 타악기의 일종인 마림바를 연주하며 몸을 숙이기도 하고 비트가 강할 때는 흔들고 구르기도 한다. 머신러닝 프로그램을 활용해 다양한 음악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은 물론 너무 빠르거나 두 팔로 연주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해 그동안 인간이 연주하기에는 불가능한 화음까지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시몬을 개발한 조지아공대 길 와인버그 박사는 “시몬은 인간 연주자들끼리 공연에서 서로 주고받는 눈짓이나 협연을 위한 동작도 하기 때문에 객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지난해 가을 개봉한 20세기폭스사의 SF영화 ‘모건’은 날이 갈수록 통제 불능의 상태로 위험해지는 인공지능(AI) 소녀 모건과 그를 창조한 과학자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비록 영화 자체로는 별다른 주목을 못받았지만 다른 측면에서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AI를 다룬 이 영화의 예고편을 AI가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IBM 왓슨에 의해 만들어진 모건 예고편은 100개의 호러무비 예고편을 분석해 무엇이 장면을 오싹하게 만드는지, 음악과 배우의 목소리 톤이 분위기를 어떻게 바꾸는지, 장면처리나 조명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분석한 후 1분 15초짜리로 최종 구성됐다. 마지막 편집 작업에서 사람의 손이 일부 필요했지만 예고편 제작에만 한달 이상 소요되는 일정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힘세고 강한 존재의 대명사로 불려온 로봇이 이제 섬세하고 창조적인 예술의 영역에도 도전한다. 그동안 로봇이 넘보기 가장 어려운 분야로 거론돼왔던 것이 창조성, 의외성, 파격성이 요구되는 예술 장르였다.
로봇은 일정한 패턴을 가진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업무에 적합한 것으로 인식돼왔지만 머신러닝의 발전과 정교한 제어기술의 진전에 힘입어 최근 몇 년 새 예술 영역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듭하고 있다.
초상화를 그려 전시회를 갖는 로봇, 도자기를 만드는 로봇, 수 편의 음악을 작곡해 발표한 인공지능 작곡가,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로봇 연주자 등은 인간 예술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로봇과 AI, 연주와 작곡 분야에서 맹활약
음악 분야에서 로봇의 활약은 연주와 작곡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에밀리 하웰’은 이미 AI 작곡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2009년 미국 UC산타크루즈대학 데이비드 코프 교수진이 개발한 에밀리 하웰은 자체 작곡하고 음반도 여러 장 발매한 프로 작곡가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라흐마니노프 등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을 학습해 분석한 뒤 그 스타일대로 화음, 박자 등 수많은 요소를 조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지난해 8월 10일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에밀리 하웰이 작곡한 음악 ‘모차르트 이후의 교향곡(음악적 지능의 실험)’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성시연 지휘자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악보를 봤을 땐 익숙한 멜로디들을 이어 붙여 다소 껄끄럽다는 인상이었는데 막상 무대에 올려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호흡이 섞여 들어가니 꽤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며 “리듬을 활용하는 방식, 각 악기들의 비중 등 모차르트만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곡”으로 평가했다.
영국의 주크덱(Jukedeck)은 AI를 활용해 수많은 음악을 작곡해 내는 스타트업 기업이다. 저작권이 강한 음악 분야에서 AI로 작곡을 하면 굳이 작곡가들에게 로열티를 줄 필요가 없으며 매장에서도 저작권을 걱정하지 않고 얼마든지 음악을 틀 수 있다고 강조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돼도 캐롤이 흘러나오지 않는 다소 적막한 연말의 거리를 생각해본다면 꽤 구미가 당기는 서비스다.
구글은 지난해부터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AI프로젝트인 ‘마젠타’를 진행하고 있다. 첫 결과물로 80초짜리 피아노곡을 공개한 바 있다. 구글은 머신러닝을 통해 설득력있는 예술과 음악이 가능한지 파악하기 위한 실험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픈소스 머신러닝 플랫폼 ‘텐서플로’를 이용해 만든 모델과 도구를 깃허브 사이트에 공개하고 있으며 마젠타를 통해 예술가들과 프로그래머들, 머신러닝 연구자들이 함께 만나는 장을 만들겠다는 것이 구글의 구상이다.
로봇 추천시스템을 활용해 소비자 취향에 맞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스포티파이, IBM 왓슨으로 음악 리뷰, 블로그 글 등을 분석해 지능적인 음악추천 서비스를 하는 퀀톤, 사람들이 유튜브에 올리는 음악 관련 동영상을 분삭해 무명의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음반사 인스트루멘탈 등은 인공지능과 로봇을 이용해 지능적인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로봇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열렸다. 도쿄에 있는 가전 양판점 ‘츠다야가전’은 지난해 11월 일본 샤프가 공급하는 로봇형 핸드폰인 ‘로보혼’을 이용해 6일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개최했다. 총 10개의 로보혼을 투입해 바이올린, 심벌즈 등 다양한 악기를 클래식 음악에 맞춰 30분 간격으로 연주했으며 지휘자 역할을 하는 로봇도 배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객 이벤트 차원의 행사였지만 로봇이 일제히 음악을 연주하는 광경은 방문객들의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았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이같은 사례를 두고 “음악 선곡부터 작곡, 연주까지 로봇 음악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드로잉하고 도자기 빚는 로봇 아티스트
미술 영역에서도 로봇은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아티스트이자 런던대학 로봇기술자인 ‘패트릭 트레셋(Patrick Tresset)’은 더 이상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림 그리는 드로잉 로봇 바울과 e다윗을 통해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독일 콘스탄츠대학의 올리버 듀슨과 프레데릭 폴 레이마리의 도움을 얻어 10년에 걸쳐 개발된 이 로봇은 카메라와 로봇 팔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그릴 대상을 시각화하기 위해 카메라가, 실제 드로잉을 위해서는 여러 개 관절로 구성된 로봇 팔이 역할을 한다. 바울보다 업그레이드된 로봇인 e다윗의 경우 다섯 개의 각기 다른 붓을 잡을 수 있고 최대 24개의 색깔을 구현할 수 있다. 바울이 제작한 초기 그림은 주요 아트뮤지엄에 전시되었고 박물관, 갤러리, 아트페어 등으로 팔려나갔으며 지난해 세계 최초로 열린 로봇 아트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콘테스트에서 바울과 e다윗을 누른 신예 로봇 아티스트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점이다. 7개국, 15개팀이 참가한 로봇 아트 콘테스트는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을 구사하되 작품은 반드시 붓을 이용해 그리는 것이 대회 규정이었다.
상금 10만달러가 걸린 이 경연의 최종 우승자는 국립 타이완대학이 만든 로봇이었다. 타이완대학 로봇의 작품 ‘Still Life’는 캔버스 위에서 붓을 사용해 색을 섞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위는 미 조지워싱턴 대학팀이, 3위는 이탈리아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팀이 각각 수상해 로봇 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도자기 빚는 로봇 역시 장인의 손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깨뜨린다. 영국 예술학교인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s)의 샬롯 노드먼은 휴먼메이드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자기 빚는 로봇 시제품을 개발했다.
머신러닝 알고리즘과 실리콘 소재의 인간 손가락모양으로 구현한 이 로봇은 가령 온라인에서 꽃병 이미지를 축적한 다음 기본 형태 윤곽을 스스로 추출하고 이를 다시 새로운 디자인으로 생성해내는 방식을 취한다. 도자기를 자율적으로 디자인하는 알고리즘과 디자인을 이해한 로봇 손가락이 이를 도자기로 구현하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노드먼은 “아직은 시제품이지만 목표는 사람이 손으로 만드는 것과 비슷한 품질의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에서 여전히 인간이 필요한 이유
다음은 춤이다. 로봇 댄스는 사실 로봇 동작 제어의 수준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활용돼온 영역이다. 로봇 전시회나 로봇 관련 행사에서 여러 대 혹은 군집 로봇들이 나와 일사분란하게 춤을 추는 이벤트를 통해 로봇을 알리고 홍보해왔다.
그러나 기계적이고 분절적인 동작이 대부분으로 인간의 동작을 가장 유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춤 사위는 아직 로봇에게 기대하기 어렵다. 계단을 오르고 손잡이를 돌리는 것도 힘겨운 로봇에게 인간처럼 춤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봇과 인간이 함께 춤추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은 가능하다. 스페인 출신 안무가 블랑카 리는 2013년 프랑스 초연부터 5년째 세계 순회 로봇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8명의 인간 무용수와 7대의 로봇 무용수가 함께 춤을 추는 협연 무대로 꾸며지는 이 공연은 이미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홍콩, 일본 등 세계 60대 도시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도 지난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셀스테이지에서 열려 관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로봇처럼 움직이는 인간, 인간처럼 춤추는 로봇을 통해 과학기술과 인간이라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로봇이 예술의 영역까지 진입하고 있지만 아직은 실험적이고 인간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지난달 20일까지 2개월 남짓 개최된 아트센터 나비의 <아직도 인간이 필요한 이유: AI와 휴머니티>전은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 예술가의 협업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전 성격이 강하다.
인공지능과 사람이 서로의 시각언어를 교환하며 함께 그림을 완성해나간 인도 예술가 하싯 아그라왈의 ‘탄뎀(Tandem)’, 인공 신경망 종류의 하나인 오토인코더를 이용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모든 프레임을 학습한 뒤 인공지능이 이를 재구성한 ‘오토인코딩 블레이드 러너’, IBM의 왓슨을 바탕으로 선보인 교육용 로봇 ‘로보판다(Robo-Panda)’, 구글의 마젠타가 실시간으로 처리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브레멘음악대’ 등은 모두 이 주제를 관통한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필요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예술가들이 로봇 아티스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는 2015년 대전 KAIST 문화기술대학원 10주년 기념식에서 “2023년이 되면 인간과 흡사하고 지적 소통이 가능한 로봇이 등장할 것”이라며 “이에 맞춰 아티스트와 음악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로봇의 세상에서 음악, 동영상, SNS가 어떻게 되고 문화와 셀러브리티(유명인)가 연결되는 어떤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셀러브리티와 로봇의 융합이 문화산업의 청사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표의 말대로 지금 아티스트를 열망하는 세대들이 인간 아티스트에게 존경과 찬사를 보내듯 미래 세대는 로봇 아티스트에게 그 영광을 돌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도자기 빚는 로봇을 개발한 노드먼의 발언은 우리에게 또다른 중요한 관점을 선사한다. 그는 “공예(예술) 작업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면 기계가 대신할 수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로봇은 예술 세계에서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 조인혜 객원기자podo0320@gmail.com
- 저작권자 2017.02.07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