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윤모(59)씨는 주말마다 지방에 있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거동하지 못하는 아버지(90)의 건강상태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평소 정정하던 아버지는 일흔을 넘겨서도 청년처럼 건강했다. 그런데 여든줄로 접어들자 뇌졸중이 찾아오더니 아예 몸을 쓰지 못하게 됐다. 침상에만 누워 있는 와상환자가 된 지도 벌써 3년째다.
아버지 간병 비용은 고스란히 외아들인 윤씨 몫이다. 노인성 질환을 인정받아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고 있지만 식대·기저귀값을 포함하면 본인 부담금도 50만원이 넘는다. 이제 곧 퇴직하는 윤씨로선 아버지 병간호에 자신의 노후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셈이다. 윤씨는 "노후 대비를 못한 아버지는 가진 돈이 없어 내가 모든 부담을 떠안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80~90대와 이들의 자녀인 베이비부머들이 ‘노후파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1955년에서 63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부머의 부모들이 90세를 넘어서면서 노후자금이 바닥나고 간병까지 받게 되면서 ‘의료파산’에 직면하고 있다. 장수를 예상하지 못했던 세대였으니 연금은 물론 의료비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결과다.
최근 고령화가 계속 진전되면서 노후파산이라는 장수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70세 초반까지는 괜찮았지만 80세를 전후해 치매·뇌졸중에 발목이 잡혀 드러눕는 고령자가 속출하고 있어서다. 이미 2015년 90세 이상 15만 명을, 100세 이상 3000명을 넘어서면서 의료파산의 폭탄이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다.
자영업자 최모(70)씨는 자신이 이런 처지에 빠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강원도 영월에 사는 97세 노모의 치매 증세가 악화하면서다. 5년 전 증세가 나타났을 때는 재택 간병을 시도했다.
하지만 증세가 심해지자 낮에만 요양시설에 보내고 저녁에 다시 귀가시켜오다 최근에는 아예 요양원에 입원시켰다. 최씨를 비롯해 형제들도 사실상 현업에서 은퇴한 상태여서 노모를 병간호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노후파산은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이미 예견된 일이다. 일본은 1990년대까지 세계적 장수국가로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20%를 돌파한 초고령사회로 급진전하면서다. 노후 준비가 부족한 고령자는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생활비 보전을 위해 일자리를 전전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75세 이후 후기 고령자는 건강수명을 다하면서 의료비 폭탄에 직면한다. 일본에서는 65세 이상 인구가 3300만 명을 돌파해 인구의 26.7%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건강수명을 소진한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기대수명은 남자 81세, 여자 87세에 달하지만 건강수명은 각각 71세, 74세에 그치고 있다. 오래 살기는 해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13년간 병원 신세를 진다는 뜻이다. 그 사이 노후자금은 바닥을 드러나게 된다.
노후파산은 이같이 10여 년의 여생을 의료와 요양에 쏟아붓는 사이 의료파산을 거치면서 현실화한다. 기력이 떨어지고 노인성 질환에 걸리면 전문의료인력의 돌봄을 받는 요양시설에 들어간다. 2000년 시행된 개호(돌봄)제도를 이용해 재택 돌봄을 시간제로 받을 수 있지만 최소한의 지원에 그치고 있어 근복적인 대책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식사와 기본 의료 서비스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노인홈 같은 요양시설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곳도 노후자금 없이는 문턱을 넘기 어렵다.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고 침대가 놓여 있는 비좁은 원룸도 한 달 입주 비용이 15만 엔이다. 20년을 생존한다면 3360만 엔(약 3억3000만원)이 필요하다. 시설이 좋은 곳은 월 30만 엔을 훌쩍 넘어간다. 더구나 입주 희망자가 급증하면서 지난해 노인홈 입주 대기자만 52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정환 실버케어커뮤니티 회장은 "일본이 이 지경인데 노인빈곤율이 50%에 달하는 한국은 더 심각한 상황이 올 것"이라며 "80세, 90세까지 넉넉히 노후를 대비해야 노후파산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호 기자 d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