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 사업, ‘선택과 집중’ 위해 재정비할 것”
“성공 가능성이 낮거나 큰 의미 없이 관행적으로 추진됐던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은 중단하거나 추후에 다시 육성하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업 재정비를 위해 주요 R&D 사업 현황을 수면 위로 올려 공론화 할 계획입니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25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정책현장 간담회에서 향후 과기정통부의 사업 재정비 계획에 대해 이처럼 밝혔다. 이날 간담회에는 산·학·연 연구자 10여 명을 비롯해 미래부, 한국연구재단,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등 과학기술정책 관계자와 언론인 등이 참석했다.
● R&D 투자 효율화 필요… 거대공공연구사업 중심으로 재정비 검토
이처럼 과기정통부가 사업 재정비에 나서는 이유는 그동안 R&D 투자 효율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았기 때문이다. 유 장관은 “19조 원이 넘는 국가 R&D 투자 예산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라며 “가령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연구를 시작했는데, 중도에 계속 추진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수입해 들여오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이 온다면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도 있다”고 설명했다.
유 장관은 “소규모의 기초연구가 아닌, 거대공공연구를 중심으로 중간점검을 실시해 재정비에 나설 계획”이라며 “연구자와 지역 등 이해당사자들과의 합의 과정을 통해 사업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 대해 예산 축소를 검토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과기정통부가 추진 중인 거대공공연구에는 한국형발사체(KSLV-Ⅱ) 개발 등 항공우주 분야와 중이온가속기 같은 연구 인프라 분야, 국제열핵융합실험로(ITER) 등 핵융합에너지 분야 등이 있다.
유 장관은 현행 1년 이상이 소요되는 국가 R&D 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기간도 획기적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 장관은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ICT)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분야에서 예타에만 1년을 소비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손병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정책기획본부장은 “첫 리뷰는 3~4개월이면 끝나지만 중간에 부처에서 보완, 수정 등을 요구하면서 기간이 더 길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에 유 장관은 “절차를 간소화 해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는 대신 추후에 재검토를 하는 식으로 당길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공약을 실천하는 데도 많은 예산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의 일환으로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 2배 증액, 청년 과학자 지원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유 장관은 “불필요한 사업을 줄여 세금 지출을 줄이는 것도 재원 마련의 한 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 장관은 “국가 R&D 사업의 성공률이 97~98% 수준이라는 점은 어떻게 보면 높은 성과일 수 있지만, 역으로 정부가 그동안 성공 가능성이 높은 연구에만 투자를 집중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관료들부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에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형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바이오임상표준센터 책임연구원은 기초연구비 증액의 취지를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초연구비 증액이 화두가 되면서 과기계 공공의 적은 국책연구가 됐다”며 “국책연구비를 줄여 기초연구비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R&D 인프라를 갖추는 등 개인 연구자들이 할 수 없는 국책연구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 ‘연구과제중심제도(PBS)’ 등 제도 개선, 정부의 정책적 의지 중요
한편 노도영 광주과학기술원(GIST) 물리광과학과 교수는 “현 제도 하에서는 기존에 성과를 잘 쌓은 사람에게만 연구비가 몰리다 보니, 연구자들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보다는 성공이나 논문 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광무 참엔지니어링 사장은 “정부가 제도적으로 연구자들을 과도하게 경쟁하도록 만들면서 데이터가 개방되고 축적되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졌다”며 “‘연구과제중심제도(PBS)’ 같은 제도를 개선하면 경쟁이 완화되면서 이런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PBS는 연구자가 인건비를 연구과제 수주로 충당해야 하는 제도다.
유 장관은 “결과 중심의 성과평가 제도를 과정 중심으로 전환하고, 중간에 나오는 산출물을 정부 차원에서 빅데이터로 만들어 연구자들끼리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연구원은 “기초연구에 대해서는 논문이 나오지 않아도 지식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는 서로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며 “특히 기초연구에서는 연간 1000만 원도 확보하기 어려운 비인기 분야 사각지대의 연구자들이 소액으로라도 독창적인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 본부장은 “과거 정부에서도 도전적이고 원천적인 ‘혁신 도약형 연구’에 한해서는 연구에 실패하더라도 ‘성실 실패’를 인정해 주거나 정산이나 감사 등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제도가 있었지만 도중에 흐지부지 된 적이 있다”며 “정부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적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구자들이 겪는 행정 부담이나 비정규직 문제도 지적됐다. 권지언 서울대 신소재공동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학생연구생 1명이 행정에만 매달리지 않는 한 연구자들이 행정 부담 때문에 연구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유 장관은 “연구지원 인력을 무작정 늘리기보다는 행정 부담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권 연구원은 “비정규직 연구원들은 ‘나의 다음 직장은 어디인가’ 항상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한 연구를 이어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엄미정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전략기획실장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은 연구비만 얘기할 뿐 사람에 관한 내용이 없다”며 “연구기관별로 비정규직도 수십 가지인데, 정규직 전환 문제도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보다는 각 기관마다 구체적인 인력 포트폴리오를 확보해 정교한 인력 운용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가 끝난 후 유 장관은 과기정통부 관료들에게 “오늘 나온 과기계 현안에 대한 토론 내용을 정리해 피드백을 달라”고 주문했다. 유 장관은 “앞으로도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을 수 있도록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송경은 기자 kyunge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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