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대한민국 ‘꿈의 전력 설비’를 현실로 만들다
입력 2019-12-03 00:29:00
초전도 강국 코리아
국내 기업이 일을 냈다. ‘꿈의 전력 설비’라는 초전도 케이블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한 달 전인 지난달 5일 경기도 용인시 흥덕 변전소와 신갈 변전소 사이 1035m 구간을 초전도 케이블로 연결했다. LS전선이 자체 개발한 시스템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공식 백서를 통해 "한국이 초전도 케이블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고 인증했다. 한국의 주력 산업 상당 부분이 선진국과 중국 기업 사이에서 샌드위치 위기를 맞고 있는 사이에 들려온 소식이다.
초전도 케이블은 이름 그대로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물질이 주재료다. 온도를 낮추면 홀연히 전기 저항이 없어지는 현상이다. 이 상태에서는 전력 손실이 사실상 완전 0(제로)이다. 현재의 구리 케이블 전력망으로는 꿈꿀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구리 전선의 저항 때문에 국내 발전소에서 가정·공장·사무실·점포·학교 등지까지 전기를 운반하는 과정(송·배전)에서만 한 해 1조2000억 원어치 전기가 허공으로 날아간다. 대략 원전 1기가 1년 동안 만드는 전력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만일 구리 송·배전망을 전부 초전도 케이블로 바꾸면 이만큼의 전기를 절약할 수 있게 된다.
이뿐 아니다. 초전도 케이블은 용량 또한 엄청나다. 한 가닥에 흘릴 수 있는 전류가 대형 구리 전력 케이블의 5~10배에 이른다. 한국전력과 LS전선에 따르면, 원전 1기에서 나오는 전력이 초전도 케이블 한 가닥이면 해결된다. 그래서 전력선 설치를 위해 지하에 지름 3m 콘크리트 터널을 만들던 것을, 그저 얇은 관 하나 묻는 것으로 대치할 수 있다. 당연히 토목공사비가 훨씬 덜 든다. 주민들이 기피하는 변전소 숫자도 확 줄일 수 있다. 초전도 케이블을 ‘꿈의 전력 설비’라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상용화까지는 걸림돌이 많았다. 초전도 현상은 108년 전인 1911년 네덜란드 과학자 카멜링 온네스가 처음 발견했다. 영하 269도에서 수은의 전기 저항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 납(영하 266도) 등에서도 확인했다. 문제는 온도가 너무 낮다는 점이었다. 연구실에서는 그런 조건을 만들 수 있으나 엄청나게 긴 전력선 전체를 그렇게까지 냉각시키고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서광이 보인 건 70년 넘게 흐른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과학자들이 영하 173도 정도에서 초전도를 일으키는 물질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LNG 온도(영하 162도)와 크게 차이가 없다. 값싸게 대량생산할 수 있는 액체질소(영하 196도)를 사용하면 초전도 영역까지 충분히 온도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게 발목을 잡았다. 물질이 도자기 같은 세라믹이었다. 구리처럼 휘고 비틀고 꼴 수 없었다. 한마디로 전력선으로는 부적절했다.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일본이 초전도 케이블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는 2007년 LS전선이 해냈다. 미국·덴마크 등에 이어 세계 4번째였다. 그러나 연구실 수준에서의 개발일 뿐, 실제 현장 적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LS전선 초전도파트의 류철희 박사(45)는 "자동차로 치면 콘셉트카를 만든 정도였다"라고 설명했다. 경제성이 있을 정도로 성능과 효율을 더 끌어올리고, 수십 만㎞ 주행 시험을 하면서 문제를 바로잡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상용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초전도 케이블은 냉각 시스템도 별도 개발해야 했다.
이런 사정은 먼저 초전도 케이블을 개발한 외국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턴 누가 먼저 상용화에 성공하느냐 하는 경쟁이었다. 국내에선 한국전력과 LS전선이 손을 잡았다. 실제 변전소를 활용하기도 하고, 제주도에 실증 센터까지 만들어 성능·운영 시험을 했다. 류철희 박사는 "초기엔 테스트 중간 결과를 국제 학회 등에서 발표해도 외국 연구진은 대부분 ‘못 믿겠다’는 투였다"라고 말했다.
실제 외국 업체 반응이 어땠나. "데이터를 보여주면 ‘제대로 검증받았느냐’는 식이었다. 세계 최초라 검증해 줄 기관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식이었다."
왜 그랬을까. "케이블 개발은 우리가 많이 늦지 않았나. 그런데 몇 년 안 돼 앞서가는 결과를 발표하니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의심하던 분위기가 바뀌었나. "논문을 계속 내고 발표를 하니 2016년 이후엔 초청 강연까지 하게 됐다."
몇 달 ‘합숙 연구’도 했다던데. "과연 상용화할 수 있을지 설치하고 실증하는 과정은 하루하루가 합숙이었다. 24시간 지켜보다가 이상이 생기면 모두 달라붙어 원인을 찾고 해결했다. 길게는 6개월을 연구·시험 시설 근처 여관에서 함께 지냈다."
선발 주자들을 추월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주 52시간 근로제 때문에 그렇게는 못 할 텐데. "교대 근무하며 퇴근은 하지만 대기 상태다. 문제가 있으면 달려와야 하니까."
IEA로부터 ‘세계 최초’ 인증을 받았다. 외국에서 설치 주문이 들어오지 않나. "문의가 꽤 있다. 사실 전부터 시장을 넓히려고 해외 전력회사들을 접촉했다. 그땐 ‘그게 뭐 하는 제품이냐’던 업체들이 이젠 ‘우리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세계 최초 상용화라지만 넘어야 할 산들이 있다. 무엇보다 가격 경쟁력을 더 갖춰야 한다. 초전도 케이블이 워낙 비싸다. 그렇다 보니 아직은 일부 특수 구간이 아니면 구리 케이블을 쓰는 게 효율적이다. 가격을 낮추자면 대량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한전이 이 길을 열고 있다. 지난달 흥덕~신갈 변전소에 이어 경기 부천시 역곡 변전소~서울 구로구 온수 변전소 구간(1.6㎞)과 경기 파주시 문산 변전소~선유 변전소 사이(2㎞)에도 초전도 케이블을 깔기로 했다. 내년에 입찰하는 네덜란드의 초전도 케이블 실증 사업에도 함께 도전한다. 류철희 박사는 "초전도 케이블이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돼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보호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초전도 소재 국산화한 벤처 기업 ‘서남’「
공기업 한국전력과 민간기업 LS전선뿐 아니다. ‘세계 최초 초전도 케이블 상용화’에는 또 다른 공신이 있다. 벤처 기업 ‘서남’이다. 초전도 케이블용 소재인 초전도 물질(선재·線材)을 만드는 업체다. 초전도 케이블 전체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소재다. 이를 서남이 공급함으로써 초전도 케이블은 소재 국산화를 이뤄냈다.
서남은 문승현(55) 대표가 2004년 창업했다. 문 대표는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1994년 초전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만, 연구에 쓰는 초전도 물질을 전부 수입하잖아? 앞으로 전력망에까지 쓰게 되면 수요가 엄청나게 늘 텐데….’
첨단 에너지 소재를 국산화하겠다고 마음먹고 회사를 차렸다. 단 세 명으로 시작했다. 문 대표와 연구원 한 명, 서무 직원 한 명이었다. 초기엔 초전도 물질 제조 공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6년이 지나 제품 판매를 시작했다. 미국 등지로 수출도 했다. 지난해 매출은 49억원, 직원은 50명이다. 연구개발 인력 중심이어서 50명 가운데 13명이 박사다. 중간중간 국내 벤처 펀드와 미국 소재 업체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한전과 LS전선은 "수입 가격이 m당 6만원인 초전도 선재를 서남은 2만원에 공급할 만큼 경쟁력이 있다"고 평했다.
초전도 케이블 상용화 과정에서 LS전선이 요구한 성능 조건들을 맞출 정도의 기술력도 갖췄다. 상용화를 계기 삼아 서남은 생산 규모 확대를 추진 중이다. 대량생산으로 소재 단가를 떨어뜨리려는 노력이다. 시설 자금을 마련하려 코스닥 기술 특례 상장 심사를 받고 있다.
문승현 대표는 "대량생산을 하면 가격을 4분의 1로 낮출 수 있다"며 "일단 규모를 2.5배가량 늘린 뒤, 시장 동향에 따라 재차 확장 투자를 해 단가를 낮춰 보겠다"고 했다. 」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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