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맨손으로 뒤쫓은 지 55년 만에 가마우지 신세 벗어났다
입력 2020-05-08 00:18:00
한국의 일본 경제 추격 현주소

그래픽=최종윤
그런데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은 한국경제의 일본 의존도 낮추기가 어느새 현실이 되고 있다. 그 최고의 척도는 산업경쟁력이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의 ‘카피캣(흉내쟁이)’이었다. 조선·철강·자동차·반도체 등 모든 핵심 기간산업이 그랬다.
반도체가 가장 극적이었다. 삼성전자 기술자들은 일본 반도체 공장을 견학할 때 머릿속에 사진을 찍듯 설비 구조를 파악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림으로 그려 핵심 공정을 파악했다. 일본도 기술 전수에 인색하지 않았다. 포항제철도 일본의 도움이 없었으면 자금이나 기술 확보가 불가능했다. 익명을 원한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일본인은 식민지 시절의 피해와 고통에 대해 빚이 있다고 느껴 한국 지원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은 가까운 일본에서 기술을 배운 덕분에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 대응에선 일본이 한국을 따라오지 못할 정도가 됐다. 단단한 산업기반과 의료체계를 구축한 덕분이다.
코로나 대응에선 한국이 앞서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경제 도약의 성과를 만방에 과시했다. 그래도 한국은 한·일 무역 역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일 무역적자는 한해 300억 달러가 넘었다. 시사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의 붕괴』(1988년)에서 주장한 대로다. 사냥한 물고기를 토해내야 하는 가마우지처럼 한국은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도 일본에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의존하는 한 가마우지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의 말대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지난해까지 55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는 6237억 달러(약 730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 대일 무역적자는 2003년 이후 16년 만에 가장 낮은 191억63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한국의 대일 수입액은 475억7500만 달러로 전년의 546억400만 달러보다 12.9% 감소했다. 한국 전체 수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도 10.2%에서 9.5%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한국의 대일 수출액은 305억2900만 달러에서 284억1200만 달러로 6.9% 줄었다. 일본 의존도가 줄어든 것이다.

『결코 일본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한국』 2015년 개정판. 구로다 전 특파원의 시각과 달리 한국의 일본 경제 의존도는 줄어들고 있다.
중요한 변화는 한국이 일본의 소부장에 목을 매지 않아도 산업에는 아무런 패닉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심스럽게 한국이 일본 경제의 그늘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 자립을 달성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기적에 가깝다. 20세기까지 지배했던 고전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국가 경쟁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전 경제학을 완성한 데이비드 리카도가 비교우위론을 통해 "영국은 직물, 포르투갈은 포도주에 강점이 있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원이 많은 나라, 첨단기술이 앞선 나라,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는 제각각 따로 있다.
이런 국가의 산업구조 속에서 기업의 선택 폭은 제한적이라는 관점이 바로 비교우위론이다. 거의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를 토대로 무역이 이뤄진다. 소부장을 일본이 생산하고 한국이 수입해 중간재를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면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건 바뀌지 않는다는 시각이다. 이 관점은 국가경쟁력 및 기업 경영전략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마이클 포터가 확 바꿔놓았다. 기업이 숙명처럼 산업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핵심역량을 통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한국 기업이 그랬다.
관광객 감소는 서로에게 손실

대 일본 무역적자는 줄어들고
지난해 7월 본격화한 한·일 경제전쟁이 10개월째 접어들면서 해외의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 외교안보 전문지 더 디플로매트(The Diplomat)는 "일본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핵심소재 수출 규제에 나서자 한국 반도체 생산에 막대한 혼란이 예상됐지만 피해는 제한적"이라고 보도했다.
오히려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소부장 자립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는 100대 핵심 소부장 육성에 나서고 여기에 2조1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소부장 경쟁력위원회까지 설치해 국내 생산을 확대하고 수입국 다변화에도 착수했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국내 중견 기업인 솔브레인은 일본에 전량 수입하던 트웰브 나인(순도 99.9999999999%) 불산액 양산 설비를 갖췄다.

전체 경제력은 일본이 여전히 앞서
일본 정부는 곤혹스럽다. 일본 제품 불매 운동까지 벌어져 지난해 하반기 한국인의 일본 여행은 거의 반토막 났다. 도요타자동차·유니클로·아사히맥주 등 일본의 간판 제품이 받은 충격도 크다. 일본 정부는 현재 추가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결국 소부장 전쟁은 일본의 경제력 약화를 드러내고, 한국으로선 일본 추격에 나선 지 55년 만에 일본 경제의 9부 능선까지 추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도 자만에 빠지거나 반일 민족주의의 망령에 휘둘리지 말고 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하는 미래지향적 자세가 필요하다.
■ 성장률 3%로 높이면 1인당 국민소득 추월도 가능「 일본이 한국을 경제력으로 압박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한국이 21세기 세계 5대 공업국에 들 만큼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구축하면서다. 그러나 한국의 총체적 국력은 여전히 일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높은 교육 수준의 인구가 2.5배에 달하고 경제 규모는 3배에 달한다. 더구나 한국 역시 일본의 뒤를 밟아 경제 노쇠 현상이 가속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 가속하는 ‘세계의 일본화 현상’이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어온 끝에 차기 정부에서는 성장률이 0%대에 진입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은 이제라도 경제 체질을 강화해 성장률을 3%로 높이면 1인당 국민소득 만큼은 일본 추월도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여기서 저성장이 굳어지면 일본 추월은 요원한 일로 남게 된다.
한번 저성장 수렁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경제 활력을 찾는가 싶더니 혁신적 기술을 내놓지 못하면서 다시 주저앉는 모습이다. 구인 배율도 올해 들어 다시 고꾸라지고 있다. 도쿄올림픽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도 혁신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일본 꼴 되는 길을 피하기 어렵다. 유일한 버팀목인 반도체도 중국에 덜미를 잡히고 있다. 중국이 지난 2월 D램 반도체에 이어 올해 말 128단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양산에도 나서면서다. 우물쭈물하면 일본 추격의 동력은 떨어지고 중국에 뒤처지는 처지가 된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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