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전문가 정조가 꼽은 노량진, 100년 뒤 한강철교 자리로
입력 2020-08-22 00:21:06
수정 2020-08-22 09:55:00
‘배다리’가 있다. 인천의 도시생태문화 거리도, 충남 당진의 한 정류장도 이 이름을 쓴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경기 고양의 지역 막걸리 명이기도 하다. 고양시 주교동(舟橋洞)은 배다리의 한자어를 가져왔다. 배다리는 배로 이어 만든 다리다.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크고 작은 강을 끼고 있다는 것. 조선 정조는 이 배다리의 전문가였다. 왕은 『주교지남(舟橋指南)』(1790년)에 적는다.
‘…배다리를 놓을 만한 지형의 편의로는 동호에서부터 훑어 내려와 보면 노량이 가장 적합하다…300발(약 545m)로 기준을 세워서 배의 수용 숫자를 논하되…지금 경강(京江·한강의 조선시대 이름)에 있는 배의 너비를 일체 30척으로 계산한다면 강물의 너비 300발 안에 60척의 배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1795년 능행차를 그린 ‘화성능행도병’ 중 일부로, 노량진을 통해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그렸다. 김홍정조는 노량의 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머물렀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정조가 배다리 전문가가 된 건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이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1776~1800) 총 12회에 걸쳐 사도세자의 묘(현륭원)가 있는 수원에 능행했다. 이때마다 왕은 노량진을 통해 한강을 건넜다. 1795년 능행차 장면이 ‘화성능행도병’으로 남아있다. 정조는 배다리 설치와 관리를 맡을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청도 만들었다.
이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은 1899년 만들어졌는데, 노량진에서 한강 북쪽의 용산으로 가기 위해 다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한강에 첫 다리가 들어섰다. 한강철교다. 1900년 7월이었다. 그러니까 올해는 한강에 다리가 생긴 지 120년이 된다. 한강 다리는 현재 32개. 서울시에는 28개가 있다. 김재경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다리는 대부분 조선 시대 나루터 위에 다져졌지만, 수계가 바뀌어 당시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고 밝혔다.
1952년 7월 한강철교를 복구한 뒤 개통식에 참석해 시승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한강철교는 국가등록문화재다. [중앙포토]
# 잠수교는 안보교
올해 장마는 역대 최장 54일 만인 지난 16일 끝났다. 잠수교는 15, 16일에도 통제됐다. 잠수교는 이미 2일부터 12일까지 열하루 연속 통제됐다. 보행자 통제는 하루 더 이어졌다. 1976년 개통 이래 가장 길었다. 박정술 한강홍수통제소 연구사는 "잠수교 통제 수위는 보행자 5.5m, 차량 6.2m로다. 수위 6.5m면 다리가 잠수한다"며 "16일에는 기준 수위에 이르지 않았지만 이전의 호우로 인한 보수 때문에 통제한 것"이라고 밝혔다.
개통 후 한달 뒤인 1976년 8월 14일에 처음 물에 잠긴 한강 잠수교. [중앙포토]
그런데 툭하면 잠기는 잠수교는 왜 만들었을까. 김 학예연구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폭파한 한강철교의 트라우마가 있다"며 "유사시 가장 빨리, 가장 적은 비용으로 복구할 수 있도록 높이를 한강 둔치와 수평이 되게 만들고 다리 중간 교각도 15m로 짧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잠수교는 이 때문에 ‘안보교’로도 불렸다. 한강철교는 1950년 6월 28일 내려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우리 군이 폭파시켰다.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다.
반포대교 달빛무지개분수는 세계 최장 교량 분수로 기네스협회 인증을 받았다. [중앙포토]
잠수교는 인공위성에도 잡히지 않는다. ‘2층’인 반포대교가 가려주기 때문이다. 잠수교는 반포대교와 함께 서빙고나루와 반포를 잇는다. 반포대교 교량에 설치된 달빛무지개 분수는 세계 최장 교량 분수(1140m)로 2008년 기네스 협회에서 인증을 받았다.
잠수교는 개통 1개월 뒤인 1976년 8월 14일 집중호우 때 첫 ‘잠수’를 했다. 중앙일보는 이날 신문 1면에 당시 상황을 급박하게 전한다. ‘잠수교가 개통 30일 만에 처음으로 물에 잠겼다…서울시는 하오 6시 30분부터 일반인과 차량의 통행을 금지했다. 11시 현재 잠수교의 수위는 9m 83㎝로 다리는 완전히 물에 잠겼다…300여 명의 시민이 몰려 거대한 다리가 물에 잠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강 다리.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잠수교는 김진아·정승호·김인문 주연의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1985년)라는 영화의 소재가 됐다. 같은 제목의 노래(박영민)가 영화에 나오는데, ‘너를 보면 나는 잠이 와/잠이 오면 나는 잠을 자…’라는 특이한 노랫말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 한남대교는 평화교
노래의 소재가 된 다리는 또 있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다. 한강진과 신사동을 연결하는 제3한강교(1969년)는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꿨다. 김 학예연구사는 "한남대교는 2002년 고속도로에서 지정 해제됐지만, 사실상의 경부고속도로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공식 기점은 부산 금정구, 종점은 서울 서초구다.
제3한강교가 1969년 개통했다. 제3한강교는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꿨다. [중앙포토]
김 학예연구사는 또 "통일이 되면 평양으로 이어지도록 하자는 의미로 평화교로 불렀는데, 안보교로 불렀던 잠수교와 반대 개념"이라고 밝혔다. 한남대교는 애초에 폭 20m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북한이 당시 대동강에 너비 25m의 교량을 만들자, 정부는 그보다 1m라도 넓게 세워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6차선 27m 너비로 계획을 바꿨다.
노량진에는 앞서 한강철교가 들어선 데 이어 근처 흑석진에 한강대교(1917년)가 만들어졌다. 한강대교는 제1한강교다. 제2한강교는 양화진과 양평동을 잇는 양화대교(1965년)다. 양화진은 한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루였다. 점차 용산포구까지 바닷물이 미치지 못하자 양화진이 용산을 밀어내고 요충지가 됐다.
양화대교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성산대교에서 바라본 장면이다. [중앙포토]
양화대교가 지나가는 선유도는 봉우리였다. 선유봉이라 했다. 일제강점기 때 홍수를 막고, 길을 포장하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면서 깎여나갔다. 1978년부터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공원으로 재개장했다. 양화대교는 ‘홍대 앞’의 관문이다. 홍대 앞이 2030의 ‘성지’가 되면서 노래도 많이 나왔다. 벅스에 뜨는 ‘양화대교’가 들어간 제목의 노래는 7개. 모두 2009년 이후 만들어졌다.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1985년)도 있다. 최근 임영웅이 불러 화제가 됐다. 뚝섬나루에 세워진 영동교는 1984년 11월에 영동대교로 이름을 바꿨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세운 한강 다리는 군사적 필요성이 강조됐다. 입석포에 만든 성수대교(1979년)는 외관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진 최초의 다리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1994년 10월 21일 상판 48m가 끊어져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날림 공사와 부실 감리가 부른 초대형 인재였다.
병자호란(1637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의 굴욕을 치렀다. 그곳에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1536년 중종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기도 했던 삼전도(삼밭나루)를 백성들은 피했다. 대신 옆의 송파나루를 이용했다. 1972년에 송파나루에 잠실대교가 들어섰다.
동호대교 야경. [중앙포토]
천호대교(왼쪽)와 광진교. 광진교는 광나루에 세워졌다. [중앙포토]
광나루-광진교(1936), 마포나루-마포대교(1970), 뚝섬나루-영동대교(1973), 공암나루-행주대교(1978), 용산포구-원효대교(1981), 동작나루-동작대교(1984), 두모포-동호대교(1985), 서강포구-서강대교(1999) 등 기존의 나루터를 이용한 한강 다리는 이렇게 대부분 1980년대까지 지었다.
노량진과 뚝섬·밤섬에서는 배를 만들기도 했다. 한강에 나룻배는 1970년대까지 있었다. 경향신문 1977년 10월 29일 자는, 한강으로 이어지는 중랑천에서 김성희(23)씨가 20원을 받고 전농동~면목동 구간에서 손님을 건네줬고, 그해 11월 면목교가 세워지면서 마지막 나룻배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고 전한다.
다리는 사람과 길을 이어준다. 동시에 사람과 길의 변화를 부른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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