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을 일깨운다" 명상 부르는 디지털 풍경
입력 2020-09-07 00:03:02
서울 도심의 갤러리 전시장에서 디지털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는 사이 나무의 사계절은 끝없이 변화한다. 우르르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색이 바래고, 잎이 지고, 열매가 열렸다가 우수수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또다시 싹이 나고….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순환의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 흐른 시간 시간은 벌써 10분, 벌써 열 번의 사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나무는 3D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라 불리는 미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니퍼 스타인캠프(Jennifer Steinkamp·62)의 대표작 ‘주디 크룩(Judy Crook)’. 실제 나무를 찍은 뒤 ‘빨리 감기’로 보여주는 영상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구현한 디지털 영상 설치 작품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대표작 ‘주디 크룩’ 장면들. 나무의 사계절을 애니메이션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디지털 영상 설치 작품이다. 실제 나무를 찍은 게 아니라 작가가 직접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구현했다. [사진 리안갤러리]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와 소격동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스타인캠프의 개인전 ‘소울스(Souls)’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UCLA 디자인 미디어 아트학과 교수인 스타인캠프는 일찍이 나무와 꽃, 과일 등이나 움직이는 유기체 혹은 추상적 형태를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용해 움직이는 이미지로 구현해왔다.
2010, 2014년에 이어 세 번째로 스타인캠프의 작품을 소개하는 리안갤러리는 이번에 ‘레티날 1(Retinal 1)’‘레티날 2(Retinal 2)’‘스틸 라이프(Still-Life)’‘주디 크룩’ 등 총 4편을 선보인다. 2018~2019년 작업한 ‘레티날’ 시리즈는 건축가 스티븐 홀(73)이 설계한 캔자스시티 넬슨 앳킨스 미술관의 브로쉬(Bloch) 빌딩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2007년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이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현대 건축물 10’의 하나로 꼽은 건물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대표작 ‘주디 크룩’ 장면들. 나무의 사계절을 애니메이션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디지털 영상 설치 작품이다. 실제 나무를 찍은 게 아니라 작가가 직접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구현했다. [사진 리안갤러리]
형형색색의 과일과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영상 ‘스틸 라이프 4’는 전통적인 정물화의 애니메이션 버전이다. 17세기 바니타스 정물화는 과일과 꽃, 그리고 죽음과 시간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골동품 등을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스타인캠프는 화면에 생명력 넘치는 과일과 꽃만을 배치하고 여기에 우주에서 유영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탰다.
리만머핀 갤러리는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담은 그래픽 영상 작품 ‘블라인드 아이 4(Blind Eye 4)’와 수중 생태계에 대한 자신의 상상을 담은 ‘태고의 1(Primordial 1)’ 등을 소개한다.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보여주는 자작나무 작품은 작가가 2018년 개인전을 연 미국 매사추세츠 주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 주변의 자작나무 숲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데이지 체인 트위스트’ [사진 리만머핀 서울]
스타인캠프는 작업 도구로 첨단 디지털 기술을 쓰지만, 그가 이를 활용해 구현한 세계는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 즉 생명체의 세계다. 나무, 꽃, 과일, 하늘과 물과 바람, 빛이 어우러져 서로 충돌하고 부유하는 가상의 아름다운 우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요소는 바로 ‘움직임’이다.
스타인캠프는 한 미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내 작품을 통해 이미지, 움직임, 공간을 감각하고 느끼길 바란다"고 했으며,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게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움직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아름다움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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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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