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학벌
입력 2020-09-10 00:19:00
"서로 ‘김 박사’, ‘이 박사’라고 부른다니까요."
엔지니어인 지인이 이직 뒤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한 말이다. 직장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대기업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뒤 연봉은 올랐다. 대신 서울대·KAIST 같은 내로라하는 대학의 박사 출신들로 둘러싸였다. 그들은 회사에서도 직급 대신 ‘박사’로 서로를 호칭하고, 회식자리에선 대학원 지도교수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이른바 ‘비(非) 서카포(서울대·KAIST·포스텍)’ 학사 출신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졸업한 지 십수 년 지나도록 대학·대학원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현실이 그는 어이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도 그런 회사가 있다니’라며 놀라웠다. 그리고 얼마 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만든 카드뉴스를 보고는 눈을 의심했다. 중요한 진단을 받을 때 어느 의사를 선택하겠냐는 질문 아래 첫 번째로 제시한 항목이 이거였다.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의사로서의 자질을 판단할 기준이 고등학교 성적이라는 황당한 논리였다. 빗발친 비난 여론에 하루 만에 문구를 수정됐지만 씁쓸함은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이 사회에서 성적, 학력, 학벌이 무엇이기에.
그래서 전직 금융사 고위 임원이 해준 이 말은 통쾌한 구석이 있다. "일단 사회에 나가면 어느 대학 나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해요. 그건 자기 실력 없을 때 하는 얘기거든. 평생을 졸업장 하나 가지고 먹고 사는 직원은 재계약해주지 말라고 했어요."
그 금융회사가 실제로 직원의 출신대학을 따지지 않았는지는 확인할 길 없다. 다만 "대학 졸업장 하나만 가지고 평생을 인정해주니까 우리나라 대학 입시가 이렇게 과열됐다"는 그의 지적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각자도생’이 생존방식으로 자리 잡은 코로나 시대. 일등, 일류, 최고를 향한 무한경쟁은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등교수업 중단에 학원까지 휴원하자, 과외 시킬 여력이 있는 일부 학부모들은 오히려 ‘학습 격차를 벌릴 기회’로 여긴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학력주의와 입시경쟁이 한두 해 된 문제는 아니지만, 학교와 멀어진 코로나 시대에 유독 더 크게 다가온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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