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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반지성주의, 지식인, 가짜뉴스, 비난,

FERRIMAN 2020. 9. 24. 11:41

[윤석만 인간의 삶을 묻다] 베네수엘라 망가뜨린 반지성주의, 한국에도 만연

입력 2020-09-11 00:31:59
수정 2020-09-11 00:42:31

 

지난해 3월 베네수엘라 대규모 정전 사태 당시 카라카스 시민들이 과이레강에서 새어나오는 물을 받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식수와 에너지 등 기본 자원이 매우 부족하다. [AFP=연합뉴스]

 

2017년 7월 30일.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수도) 서쪽 ‘1월 23일 지구(Barrio 23 de Enero)’에서 붉은 화염이 타올랐습니다. 이곳은 우고 차베스가 1992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킨 장소였고, 2002년 축출 위기에 처한 그를 시민들이 육탄으로 막아낸 곳이었죠. 차베스의 상징 같은 지역에서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린 것입니다.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도화선이긴 했지만 근본 원인은 망가진 경제 탓입니다. 원유 매장량 세계 1위의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는 지금 국민의 94%가 빈곤상태입니다(2019년 3월 UN). 물가는 매년 하늘 높이 치솟고(중앙은행, 2019년 물가상승률 9585%), GDP는 6년 새 3분의 1로 쪼그라졌습니다. 

그 결과 집권당인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2015년 총선에서 167석 중 55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마두로는 의회를 해산하고 친정부 인사들을 모아 제헌의회를 구성했고요. 그러자 나라 곳곳에서 반대 시위가 열렸는데, 가장 격렬했던 곳이 ‘1월 23일 지구’였습니다. 

2019년 베네수엘라는

알레한드로 벨라스코 뉴욕대 교수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차베스주의의 내적 모순이 나타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위기·분쟁에 빠진 차베스주의』). 좌파 정부의 경제적 무능과 권위주의적 탄압으로 인해 지지기반이던 하층민조차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죠. 벨라스코는 "차베스주의는 역사의 쓰레기장으로 버려져야 할 대상인가"하고 반문합니다. 

무상 교육·복지, 토지공개념, 반시장 등 포퓰리즘을 내건 차베스의 ‘21세기형 남미 사회주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2000~2010년 144볼리바르에서 1223볼리바르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지나친 공공부문 확대 같은 현금 살포 정책으로 나라 곳간이 텅텅 비었고요. 한때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도 차베스주의를 이상으로 꼽았지만 지금은 언급조차 하지 않죠. 

안재욱 경희대 명예교수(경제학)는 "석유 등 핵심 산업의 국유화, 가격·외환 통제, 무분별한 통화 팽창 등 잘못된 포퓰리즘이 나라를 망쳤다"고 지적합니다. "1950년 1인당 GDP가 세계 4위(7424달러)였던 베네수엘라는 1980년대 이전까지도 가장 부유한 나라 20위 안에 들던, 가난하려도 가난할 수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죠. 

이렇게 위기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미의 유명 사회학자 에드가르도 랜더는 비판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차베스주의가 실패했다고 지적합니다. "지나치게 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달리 의회는 약했고, 합리적 논쟁을 벌이는 공공영역이 축소됐다"는 것이죠. 

좌파 정권과 대중 사이에는 차베스에게 쓴소리하는 지식인을 배척하고, 전문성을 가진 엘리트 집단을 무시하는 풍토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포퓰리즘이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해도,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비판적 지성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차베스는 ‘민중의 자본 통제’를 선언하며 기업의 전문 인력을 제거하고 노동자위원회를 만들어 경영에 참여시켰습니다. 또 대기업을 국유화해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낙하산 인사들을 요직에 앉혀 부실경영을 야기했죠.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상의료 정책을 실시했지만, 정작 병원과 약국에선 간단한 약품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카라카스 빈민가 건물외벽에 그려져 있는 차베스(왼쪽)와 그의 후계자인 마드로. [AP=연합뉴스]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과 지식인에겐 재갈을 물렸습니다. 김충남 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우호 매체를 앞세워 국민을 선동하고 비판 언론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 탄압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랏돈을 여론의 환심을 사는 데 쓰고, 국민들도 세금을 내기보다 정부 지원금을 환영"(안재욱 교수)하면서 ‘차베스 왕국’은 굳건해졌습니다. 

정권의 폭주를 견제하는 지식인과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1964년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이를 ‘반지성주의’로 설명합니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을 예로 들며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반지성주의’가 한 사회를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분석했죠(『미국의 반지성주의』). 

미국 사회를 ‘반공’의 광기로 몰아갔던 조셉 매카시처럼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에 대한 반감을 부추겨 국민의 눈을 멀게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관리하는 권한에서 전문성과 지성을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죠. 호프스태터는 특히 "반대 세력을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악마화하는 경향이 ‘반지성주의’에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반지성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시민들의 우민화입니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확증편향과 가짜뉴스, 음모론, 진영논리 같은 것들이죠. 권력자의 말이면 무조건 믿게 만들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사실보다 거짓을 진짜로 여기는 세뇌된 대중"이 돼 버립니다(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 

오늘날 한국 사회도 ‘반지성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민주적’이어야 할 문재인 정권이 ‘반지성주의’에 앞장서고 있죠. 안재욱 교수는 "과다한 복지 지출과 가격 규제, 기업 감시처럼 베네수엘라의 뒤를 좇는 정책들이 많다"며 "오랫동안 시장과 기업, 정부의 역할을 연구해온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정권의 전문가 무시 행태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처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나왔을 때 대한의사협회가 6차례나 중국인 입국 금지를 제안했지만 거부했습니다. 7월 외식·숙박 쿠폰을 뿌리고 임시공휴일을 지정할 때도 방역을 완화해선 안 된다는 의료계의 경고를 듣지 않았죠. 원전 폐기 정책을 추진할 때 역시 과학자들의 의견은 묵살됐습니다.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고 시민단체 등 비전문가들의 입김이 매우 컸습니다. 



‘반지성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 

비전문가의 득세는 의료·과학계뿐 아니라 전 영역에서 광범위합니다. 지난달 보건복지부는 공공의대 후보 학생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위원회에서 추천한다고 밝혔습니다. 비판 여론에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여당 의원들은 KBS 이사진과 경찰 자치위원에 시민단체, 지역사회 인사를 포함하는 법안까지 발의했습니다. 전문가 대신 정권 코드에 맞추는 비전문가를 앉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모습이 차베스와 똑 닮았죠. 

비판 언론을 ‘기레기’로 만들어 무력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여권은 조국·윤미향 사건이나 추미애 아들 이슈처럼 불리한 사실이 나오면 가짜뉴스로 몰아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립니다. 이들에게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팩트가 아니라, 자신의 바람대로 꿰맞추는 창조의 산물입니다. "부동산값이 오르지 않았다"거나 "증거 인멸이 아니라 증거 보존"이라는 발언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고요. 

반대 목소리는 메신저를 공격하는 진영논리에 의해 무력화되죠. 최근 의료계 파업 때 의사들을 기득권으로 몬 것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방역은 팽개치고 기득권 지키기에 몰두하는 ‘의사 바이러스’"(김경협 의원), "국민의 생명과 환자를 볼모로 삼은 집단 이기주의"(허윤정 대변인)같이 의사들을 적폐로 몰고 여론의 반감을 조장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의사와 간호사를 갈라 ‘분할 통치(divide & rule)’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던 약속과 달리 문 대통령 스스로 ‘문파’의 SNS 공격도 ‘양념’이라며 반지성주의를 묵인하는 형국이죠. 김충남 전 교수는 "적과 동지로 나눠 반대편을 악으로 낙인찍고 자신을 정의로 미화한다는 점에서 현 정권과 차베스는 비슷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특히 "견제와 균형, 건전한 비판이 무너진 후에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반지성주의에 늪에 빠져 있습니다.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도, 망국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리버럴 정권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지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윤석만 논설위원 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