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9) 명문가의 비밀은 없다
[뉴스비전e] 나에게는 아들 셋, 딸 셋이 있다. 아들, 딸, 아들, 딸, 딸, 아들 순이다. 요즘사람들은 딸 하나, 아들 하나면 200점이라고 하니 아내는 600점인 셈이다.
6남매 모두 공부도 일도 열심히 했고,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의사가 다섯(아들 둘, 사위 셋)이나 되어 밖에서는 ‘의사집안’이라 부르기도 하고, 모두 귀국해 종합병원을 설립해도 되겠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손자까지 3대가 다 모이면 40명이 넘는 대가족이고, 증손자까지 4대가 모이면…… 글쎄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손자들도 잘했고 증손자들도 잘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집안을 ‘명문가’라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처럼 ‘명문가의 비밀’ 같은 것은 없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 나는 6남매의 공부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자율에 맡겼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새 학년이 되면 아내는 지난해 달력을 알뜰하게 잘 모아두었다가 나에게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이 차례대로 새 교과서를 가져왔다. 나는 달력을 뒤집어 한 권 한 권 하얗게 싼 다음 검정 글씨로 ‘국어’, ‘산수’, ‘사회’ 하고 정성스레 써주었다. 연필도 새로 깎아주곤 했다. 시작할 때 마음가짐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뿐이다.
그 후로 “공부해라”, “1등을 해라”, “명문대에 가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요령보다는 미련할 정도로 열심히 하라고만 했을 뿐이다. 우등상보다는 개근상을 더 중시했지만, 잘했든 못했든 성적표만큼은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성적의 변화를 보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분발하라는 뜻이었다. 6남매의 국민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성적표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맏아들 광준이는 세브란스(연세대 의대)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 1962년 서독 훔볼트와 계약하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우고 돌아와서야 광준이가 세브란스에 진학한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체능시험 비중이 커져 체력이 약했던 광준이에게는 무척이나 불리해 광준이도 아내도 맘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광준이는 세브란스에 합격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광준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세브란스 졸업 후 미국에서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로체스터 의대와 연계된 미국보훈병원(Veterans Affairs Medical Center)에서 영상의학과 과장 등으로 의학도의 훈련과, 한국전과 베트남전 재향군인의 의료에 전념했다.
성공한 개업의보다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의술가의 길을 걸었다. 옛날 평양에서 개업의셨던 나의 아버지도 장남(나의 큰형)을 경성제대 의학부에 보낸 후 “돈은 내가 벌 테니 너는 공부하는 의사가 돼라”고 하셨다.
맏며늘아기는(최옥희)는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졸업한 후 미국 로체스터 공대에서 순수미술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추상미술가로 활약 중이다. 새색시 때는 북쪽(평양) 풍습에 적응하는 데 힘겨워하는 모습에 안쓰러움이 많았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위로해주었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듯 집안의 화목을 잘 이끌어왔다.
큰아들 내외는 1971년 미국으로 이민 가서 두 딸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이민생활은 무척 어려웠다. 학회 일 등으로 캐나다 등지로 출장을 가면 돌아오는 길에 로체스터에 들르곤 했다. 한번은 아직 취학 전인 손녀들이 앵무새를 사달라고 부모를 졸라대고 있었다. 손녀들이 울고불고 야단인데도 부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새를 사주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책임감을 갖게 되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리고 손녀들을 데리고 나가 새를 두 마리 사주었다.
“잘 키워 보거라.”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손녀들은 지금까지 그때 새 이야기를 한다. 손녀 모두 명문 웰즐리대를 졸업했는데, 큰손녀 은주(Lisa)는 보스턴대 로스쿨에서 법학학위를 받고 변호사로 일하다 웰스파고은행에서 자산기획가로 일하고 있다.
은주는 가장 오래 보아서인지 나를 무척 잘 따른다. 나의 100세 기념 때도 한국으로 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세라미스트 인생’에도 관심이 많다.
동생 은경(Vickie)이는 졸업 후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주립대 몬트레이 캠퍼스에서 교수로 일하다 첫 아기(Yuna)를 돌보려 잠시 쉬고 있다. 은경이가 쓴 《YELL-Oh Girls》(얘들아, 소리를 내어 말해봐 / Harper Collins 펴냄)는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소수민족 10~20대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에서 자랑스럽게 살도록 응원해 준 이 책은 학교와 도서관에서 참고도서로 많이 읽히고 있다.
해외출장 중에 들렀을 때 큰며늘아기가 아침마다 두부를 크게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여준 두부찌개의 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맛있다!”, “맛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때만 해도 로체스터에는 한국음식 재료가 마땅치 않아 며늘아기는 무엇을 대접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그 옛날 혜화동에서 새벽에 줄넘기를 할 때마다 두부장수 종소리가 들리면 두부를 몇 모 사다가 아내에게 주곤 했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광준이 내외와 캐나다에서
맏딸 광순이는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열네 살 때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이후 주목받았다. 광순이는 이화여중, 이화여고를 나왔다. (나는 딸 셋을 모두 이화여중고에 보냈다고 기념상도 받았다.)
광순이는 서울대 음대 4학년 때 일본 구니다찌음대 100주년 기념공연 때 우리나라 대표로 초대받았는데 거기서 오스트리아 빈(Wien)음대 교수를 만나 빈으로 유학을 갔다. 결혼 후 1971년 미국으로 이민 가 독주회를 비롯해 활발하게 연주하다 1994년 호암아트홀 연주를 끝으로 아이들 교육에 전념했다.
아내가 음악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나의 책임도 없지 않았는데, 광순을 통해 미안함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연주회 때마다 오빠, 동생들이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고 나는 티켓을 팔러 다니던 기억이 생생하다. 큰 무대에서 연주하던 모습도 좋았지만, 어린 시절 사랑방에서 고사리손으로 건반을 두드릴 때 밖에서 기다리며 듣던 피아노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맏사위(차재철)는 196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공군비행군의관으로 복무한 후 1971년 도미해 오하이오 주 케이스웨스턴대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임상・해부병리학 전문의로 일리노이와 버지니아 주에서 30년 넘게 환자를 치료했다.
남매를 두었는데 둘 다 스탠퍼드대에서 학사, 석사를 받고, 아들은 UCLA에서 의학박사학위(M.D/Ph.D)를 받은 후 벤처투자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딸은 런던비즈니스스쿨(LBS)에서 MBA를 받고 포터리반에서 글로벌브랜딩매니저로 활약하고 있다. 광순이도 아들한테서 셋, 딸한테서 둘, 모두 5명의 손주를 얻었다.
둘째아들 세현이는 서울대 공대 응용화학과를 나왔다. 나의 과 후배이자 6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나와 같은 공학도다. 군복무 후 오리건주립대에서 화공학 석사, 미시건대에서 금속재료공학으로 또 하나의 석사를 받고 테네시대에서 고분자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네소타에 있는 3M에서 36년간 연구개발(R&D)에 매진한 후 2017년에 은퇴하고 지금은 부쉬톨(Bushitol)컨설팅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30년간 미네소타 주 한인회 이사장, 재미과학협회장 등 여러 직분을 맡아 지역사회에 봉사해 왔다.
둘째며늘아기는 외국어대 불문과를 나와 미네소타에 온 후부터 그곳 한인들을 위한 복지센터에서 20년 이상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큰아들 택우는 노스웨스턴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미네소타대에서 의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로체스터에 있는 세계 최대 병원인 메이요(Mayo)의료원에서 일반외과 레지던트, 위스콘신대에서 흉곽외과 연수를 마친 후 델라웨어에 있는 크리스티나병원 암센터에서 흉부외과의로 일하고 있다. 둘째아들 택수는 위스콘신대와 드폴대를 나와 애틀란타 조지아에서 한국 회사의 해외마케팅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둘째딸 광희는 이화여대 의류직물과를 졸업하고 결혼해 두 딸을 얻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둘째사위(배성호)는 해군 군의관 복무 후 미국 신경과전문의와 뇌파전문의로 델라웨어 주에서 36년간 근무하면서 필라델피아 토마스제퍼슨 의대 신경과 임상교수로 활동했다.
의료활동을 하는 중에 감사하게도 미연합감리교회의 안수목사가 되었다. 광희는 남편과 함께 전인적 치유에 동참하는 등 여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뉴욕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큰딸은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후, 존스홉킨스에서 마케팅매니저로 일하다 가족치료전문과정(FMTM)을 마치고 가족치료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둘째딸은 터프츠대를 나와 조지워싱턴대에서 유아발달과정(ECDM)을 마치고 교육상담역으로 활동하다 학교행정관리자로 일하고 있다. 광희는 두 딸에게서 6명의 손주를 얻었다.
셋째딸 광선이는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중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셋째사위(문대옥)는 서울대 의대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펜실베니아에서 정형외과 수련 후 델라웨어에 있는 트라우마 레벨1센터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젊은 수련의들도 가르치고 있다. 미주서울대의대총동창회(회원 1,200명) 회장도 맡아 동창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모교를 도왔으며 한인 지역사회를 위해 델라웨어주 한인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1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인 경택(Daniel)은 메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하고 콜럼비아 의대를 졸업한 후 워싱턴 세인트루이스 의대와 하버드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수련 후 콜로라도대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젊은 수련의들을 양성하는 데 열심을 다하고 있다.
큰딸 소영(Christina)은 하버드대, 브라운 의대를 졸업하고, 존스홉킨스 의대 윌머안(Eye)연구소, 마이애미대학병원 바스콤팍머안(Eye)연구소에서 안과 수련 후 하버드대학병원에서 각막전문의로 젊은 수련의들 양성에 힘썼다.
현재 남편의 필라델피아 전근으로 펜실베니아대에서 안과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막내딸 현영은 예일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TV드라마 배경이 되기도 한 브롱크스(Bronx)보호기구에서 가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가정을 돕고 있다. 광선이는 손자 둘, 손녀 셋을 얻었다.
셋째아들 명현이는 한양대 의대를 졸업하고 한양대학병원에서 영상의학과 수련 후 전문의를 취득해 몇몇 종합병원 영상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다 지금은 서울 개포동에서 22년째 영상의학과의원을 개원 중이다.
셋째며늘아기(최은자)는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 후 전업주부로 두 딸과 시부모님을 모시고 지냈다. 큰딸 현주는 예원예고와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대에서 조경학석사 수료 후 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경회사에 근무 중이고, 둘째딸 현경은 예원예고와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둘째사위가 산업통상자원부에 근무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의 예전 상공부 시절이 떠올라 좋았다. 명현이는 6남매 중 유일하게 한국에 살면서 나를 돌봐주고 있다. 막내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짧아 슬프다는데, 명현이와 함께 지내는 것은 축복이다.
[양송 남기동 선생이 걸어온 길]
1919 평남 평양 출생
1940 일본 제 6고등학교 이과 졸업
1943 경성제대 이공학부 응용화학과 1회 졸업
1946 상공부 산하 중앙공업시험소(지금의 국립공업시험원) 요업과장
1947 서울대 공대 강사
1954 서울대 대학원 강사
1956 상공부 화학과장 기정(技正, 옛 기술직 4급 공무원. 지금의 서기관)
1959 상공부 공업국기감(技監, 옛 기술직 2급 공무원. 지금의 이사관)
1960 한양대 공대 교수, 한국요업학회 회장
1962 쌍용양회 기술담당 상무
1974 전엔지니어링 부사장
1975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1977 대한화학회 회장
1980 동양시멘트 사장
1983 동양종합산업 회장, 동양시멘트 부회장
1982 대한요업총협회 회장
1984 서울대 공대 동창회장
1984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 조직위원장
1990 인도네시아 시비뇽시멘트(P. T. SEMEN CIBINONG) 최고자문
1993 인하대 명예공학박사
2001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 조직위 명예위원장
[서훈 및 수상]
1964 은탑산업훈장
1967 대한요업총협회 기술상
1981 3・1문화상(기술 부문)
1981 대한화학회 공로상
1987 한국화학공학회 공로상
1989 서울대 공대인상 대상
1994 한국세라믹학회 제1회 ‘성옥상’
2006 서울대 공대 선정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상
2006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 수상
2014 한국엔지니어클럽 선정 ‘조국 근대화의 주역 17인’ 상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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