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거짓과 증오 중독’이라는 이름의 병
입력 2020-09-10 00:39:00
2020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조 바이든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1975년 5월 28일,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스 아렌트, 당신이 ‘보스턴 바이센테니얼 포럼(Boston Bicentennial Forum)’에서 발표한 강연을 소개한 톰 위커의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나는 국제관계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당신의 발제에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발제의 복사본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이든이 이 편지를 보낼 때 그는 만 32세의 젊은 정치인이었다. 바이든이 아렌트에게 보낸 짧은 편지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바이든의 편지를 접하고서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상원의원으로서 분주했을 바이든이 새로운 정치적 관점을 배우고자 하는 그 적극성이다. 둘째, 바이든이 아렌트 발제문에서 주목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바이든이 언급한 톰 위커의 글은 1975년 5월 25일 자 뉴욕 타임스에 게재된 ‘거짓말과 이미지’라는 제목의 기고문이다. 위커는 이 글에서 아렌트가 포럼에서 발표한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기(Home to Roost)’라는 제목의 발제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진실과 사실의 추구이다. 아렌트의 발제는 거짓과 이미지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다. 소위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진실과 사실을 거짓으로 대체하면서 대중을 특정한 인물에 대한 증오의 도구로 만드는 현상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가져온다. 아렌트는 "지속적인 거짓"에 의해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부식되어 버린다"라고 지적하면서, 거짓이 진실과 사실을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다고 경고한다.
1975년 아렌트의 분석과 문제제기는, 2020년 한국 정황에서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지식인과 정치·언론·교육·종교·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권력에의 욕망을 가지게 될 때, 그들은 거짓에 기반하여 진실을 왜곡시킨다. 거짓은 쉽게 대중을 선동해서 공공의 적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거짓을 통해서 공공의 적을 향한 증오를 부추김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주사회의 정치적 위기를 생산하고 있다. 거짓은 현실을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자신의 현실로부터 분리시킨다. 반복적인 거짓에 의해 선동되고, 거짓과 허위보도가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될 때, 사람들은 후에 사실과 진실이 드러나도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정치적 권력확장에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이들은, 치열한 토론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 식의 거짓과 허위사실 유포를 통해서 대중들을 선동하면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증오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거짓과 증오에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진실과 사실을 거짓과 선동적 이미지로 대체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거짓에 중독이 된다. 그 중독증은 추종자들에게도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다. 아렌트가 1975년, 거짓과 선동적 이미지의 지배가 민주사회의 심각한 위기를 가져온다고 경고하던 시기보다 더 위험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거짓과 가짜 뉴스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사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거짓과 허위보도는 디지털 미디어들을 통해서 더욱 자극적으로 과장되어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확산된다. 거짓에 중독이 된 이들은 후에 사실과 진실이 밝혀져도, 특정한 인물이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오류를 결코 수정하지 않는다. 오류를 수정할 경우 증오의 토대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후에 진실과 사실이 밝혀지면, 그 사실을 뒤틀면서 또 다른 거짓과 허위 정보를 이어간다. 아렌트의 표현대로 하면 거짓과 가짜뉴스가 "삶의 방식"이 되어가고 있다. 진실이나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고도의 인내심과 복합적인 접근이 요청된다. 반면, 거짓말이나 가짜 뉴스는 아무런 인내심을 작동시킬 필요도 또한 사유할 필요조차 없다. 많은 사람이 사실과 진실보다, 거짓과 가짜뉴스에 더 환호하는 이유이다.
거짓과 가짜 뉴스는 삶과 죽음의 문제다. 필립 하워드가 올해 출판한 『거짓말 기계들 (Lie Machines)』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점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거짓과 허위보도에 의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해왔음을 우리는 목격했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도, 또한 이미 사회적 죽음을 경험한다. 사실과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간혹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해도, 민주사회는 사실과 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제 기능을 한다. 거짓과 허위보도가 아니라,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회만이 민주주의를 성숙시킬 수 있다.
아렌트는 그의 발제를 다음과 같이 매듭짓는다. "사실들이 되돌아왔을 때(Home to Roost), 적어도 그 사실들을 환영합시다." 진실과 사실이 우리에게 되돌아왔을 때, 또 다른 선동적 이미지와 거짓의 세계로 도피하지 말고 그 진실과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서 거짓의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들을 위한 민주사회를 위해서.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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