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평가 안 받고 연구 몰두…"세상 바꿀 원리 찾을 것"
입력 2021-05-08 00:02:05
카이스트 첫 싱귤래러티(singularity·특이점) 교수로 선정된 백세범(왼쪽)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와 양용수 물리학과 교수. 앞으로 10~20년간 논문 평가를 받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선도자 임무를 맡게 된다. 김성태 객원기자
교수사회에서도 연말은 스트레스의 계절이다. 한 해 동안 논문은 얼마나 썼는지, 인용은 얼마나 됐는지 등 연구성과를 보고서로 자세히 써내야 한다. 이런 평가에 따라 호봉이 오르고, 승진도 된다. 테뉴어(영년직) 심사 또한 마찬가지다. 여느 직장인이나 다를 바 없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먹여 살릴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계량화된 평가를 통과하기 위해 논문의 질보다 양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고만고만한 논문을 ‘찍어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국내 과학기술계에서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세계 1위라는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은 고사하고 새로운 성장엔진 하나 못 만들어내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고백한다.
1년간 6차례 특별심사위, 경쟁률 11대 1
KAIST가 이런 문제에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해 2월 발표한 ‘싱귤래러티(singularity·특이점) 교수’제도가 그것이다. 당시 KAIST는 ‘임용 후 10~20년간 논문 평가를 받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제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혁신적 과학기술을 만들어낼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형 연구자를 낳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KAIST가 채용공고를 낸 지 1년 만인 최근 첫 싱귤래러티 교수를 선정했다. 바이오및뇌공학과 백세범(46) 교수와 물리학과 양용수(36)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두 교수를 뽑는 과정은 난산이었다. 지난 1년간 총 6차례의 특별심사위원회가 열렸고, 그 사이 지원자가 적어 추가 접수까지 해야 했다. ‘10~20년간 논문평가 무(無)’가 획기적인 혜택이면서도 그만큼의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래도 경쟁률은 11대1은 됐다. 현재까지 평가로만 보면 두 교수의 실적은 평균 이하다. 백 교수는 2013년 KAIST 교수에 임용된 뒤 논문 수가 부족해 두 차례나 승진에 탈락한 뒤 지난 3월에서야 간신히 부교수가 됐다. 양 교수는 아직은 학생 같은 얼굴을 한 임용 4년차 조교수다. ‘과학기술 발전의 최정점’쯤으로 풀이되는 싱귤래러티란 이름을 처음으로 딴 교수 2인을 6일 중앙일보가 만났다.
먼저, 백세범 교수부터 인터뷰했다.
무엇을 연구하나 "대부분의 뇌 연구는 고전적인 생물학적 접근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나는 이론물리학적인 관점에서 그 기저 원리를 먼저 이해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는 뇌의 다양한 기능이 어떻게 최초로 발생하게 되는가를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현재 다양한 주제에 대한 뇌과학·공학 연구가 활발하지만, 대부분 개별적으로 현상을 관측하고 응용하는 것일 뿐, 아직까지 뇌가 작동하는 근본원리는 파악이 안 돼 있다. 물리학에는 ‘F=ma’(힘은 질량 곱하기 가속도)와 같은 역학, 전자기학 등의 기본 원리가, 화학에서는 주기율표와 같이 정리된 형태의 기저 원리가 있는데, 아직 뇌과학에는 그런 게 없다. 나는 수많은 실험결과를 하나의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뇌신경회로 기능의 원리를 찾아 그 기저 이론을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물리학에서 뉴턴역학이라는 기본 원리의 정립과 비유될 수 있을 만큼의 돌파구를 뇌과학 연구에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도전적인 연구라고 하기에도 너무 벅차 보인다. "지난 10여년간 연구를 통해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허블과 비셀의 이론적 모델들이 상당한 정도로 수정돼야 함을 학계에 증명해왔다. 그간 내가 발표한 연구 결과들은 기존의 논문 수백여 편 이상이 폐기돼야 한다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을 보이고 있어, 기존의 상식에 익숙한 연구자들의 강력한 비판과 공격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 내 연구를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들이 다수 축적돼 생물학적인 정당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아직은 단편적인 예시이지만 나의 연구 방식이 이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구체적 성과를 말하자면. "그간에도 주요 국제학술지에 신경망의 기능성 구조 발생에 관한 연구 결과를 실었지만, 특히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셀 자매지에만 3편,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와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 표지논문, 사이언스 등에 관련 논문을 다수 게재해 그간 쉽게 인정받지 못하던 연구의 핵심 주장을 폭넓게 인정받기 시작했다. 의미 있는 전환점을 맞고 있다고 판단한다."
처음엔 자신감 가득한 백 교수의 주장이 과장처럼 들렸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학문 족보’도 화려하다.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196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널드 글레이저(1926~2013) 교수라고 했다. 백 교수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 글레이저 교수가 80세, 그가 마지막 제자였다. 게다가 글레이저 교수의 지도교수 등 직계 스승 3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칼 앤더슨(1936), 로버트 밀리컨(1923), 앨버트 마이컬슨(1907)이 그들이다.
연구목표가 원대한데, 성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성공이 담보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 있는 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고, 이런 시도가 계속 축적돼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노벨상이 목표는 아니지만 지도교수님들이 대를 이어 물려주신 노벨상 가업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은 있다."
백 교수가 반농담처럼 웃었다. 이쯤 되니 백 교수의 IQ가 궁금했다. 그는 고교 때 검사해보니 155가 나왔다고 했다. UC버클리에서 들었던 수업은 모두 만점을 받아 비공식적으로 성적 1등이다.
우연이지만, 양용수 교수도 백 교수처럼 과학고가 아닌 일반고를 거쳐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했고, UCLA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물론 10년 선후배지간이라 두 사람이 KAIST에 오기 전 만난 적은 없다. 양 교수는 백 교수와 느낌은 다소 달랐지만, 인터뷰 내내 겸손하지만 자신감에 찬 또렷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연구 목표가 뭔가. "유리와 같은 비결정질 물질의 3차원 원자들의 구조를 단일 원자 단위로 측정하는 것이다. 숯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질 물질은 원자들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지만 유리는 아직 그 구조가 알려져 있지 않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립 앤더슨 박사는 1995년 사이언스 기고문에서 ‘현재 고체물리학 이론에서 가장 깊이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유리(glass)와 유리 상전이(glass transition) 현상에 대한 이해일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또 다른 목표는 비결정질 물질의 원자단위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현재보다 1000분의 1 수준으로 투과 전자량을 줄인 3차원 전자토모그래피 현미경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의 토모그래피 현미경으로 유리질을 관찰하려고 하면 전자량이 많아 유리의 구조가 깨져버려 실체를 볼 수 없다."
이 연구가 인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유리와 같은 비결정질 물질은 안정적 상태가 아니라 깨지기 쉽다. 현대 반도체 소자 공정의 초소형화에 따라 나노미터(㎚) 수준에서 개발되는 금속- 절연체- 반도체의 경계면에는 필연적으로 비결정질 구조가 나타난다. 미래 소자 산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결정질 구조와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동역학적 과정인 유리 상전이 현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퍼스트 무버형 과학자 성장 토대 구축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건가. "그간 연구를 통해 전자토모그래피의 해상도를 원자단위까지 끌어올려 나노물질의 3차원 구조를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현재로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연구진만이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최근 4년간 이 기술과 관련해 네이처에 2편의 논문을 실었다. 연구 목표에 계획대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백세범·양용수 두 소장파 교수의 연구 대상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 학자들도 풀지 못한 난제다. 이제 한국에도 퍼스트 무버형 과학자가 성장할 토대가 구축되기 시작한 걸까. 신성철 전 총장은 지난해 2월 본지와 인터뷰에서 "싱귤래러티 교수로 KAIST 교수 650명 중 2%에 해당하는 10명을 뽑을 예정인데, 이 중 한 명이라도 성공하면 된다. 다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고 말했다. 그는 "쉬울 것 같으면 누구나 하지 않겠나. 임용 10년 뒤 평가가 만족스럽지 못해 추후 10년이 연장되지 않는 연구자는 매년 평가를 받는 일반적인 교수의 코스를 밟게 된다"고 덧붙였다.
■ 백세범 (46)
● 서울대 학사(원자핵공학ㆍ물리학), 물리학 석사
● 미국 UC버클리 물리학 박사
● UCLA 박사후연구원
● KAIST 교수(2013~ )
■ 양용수 (36)
● 제주 오현고
● 서울대 학사(물리학ㆍ수학)
● 미국 미시간대 물리학 박사
● UCLA 박사후연구원
● KAIST 교수(2018~ )
」 ■ 유리 상전이(glass transition)「 비결정질 물질 중 대표적인 유리의 경우 급속냉각을 이용해 만들어지는데, 고열 속에 녹은 물질을 급속도로 냉각할 경우엔 안정상태인 결정질이 되지 못하고 준안정상태인 비결정질로 굳어버린다. 유리 상전이는 이런 현상을 말한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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