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중앙일보] 과학사, 과학 발전, 과학의 기원, 과학 선진국

FERRIMAN 2021. 7. 5. 10:47

[중앙시평] 과학의 민주적 대혁명을 기대한다

입력 2021-07-05 00:44:00

 

과학은 과연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간단한 답은 없다. 중국을 비롯하여 모든 고대문명은 기술을 발달시켰고 심오한 학문도 추구하였지만, 과학이라는 것이 뚜렷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6~17세기 유럽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때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혁명적 발전은 그 후에도 종종 있었으므로 필자는 그 원초적 사건을 특별히 ‘과학대혁명’이라 지칭해 본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는 과학의 기원을 그렇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논란도 많다. 하지만 과학대혁명기에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났던 것은 확실하다. 첫째는 학자와 장인이 같이 일하는 실학 정신이 생겨났다. 실학은 우리 역사에 나오는 개념이지만 서양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유럽에서도 전통적 학문은 탁상공론이 대부분이었는데, 베이컨 등의 학자들은 거기에 반발하여 자연에 대해 뭔가를 배우려면 모든 현상을 직접 자세히 관찰하며 또한 여러가지 실험을 고안하여 저절로 잘 나타나지 않는 자연의 비밀도 드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 초기의 과학자들은 탄광이나 작업장등에서 얻은 실용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했고, 현미경에서 진공펌프까지 다양한 새로운 실험기구 및 관측기구를 만들어서 위험한 화학실험에서 끔찍한 생물학의 생체실험까지 직접 손을 대는 온갖 연구를 하였다. 더럽고 힘들며, 점잖은 양반들이 할 짓은 아니었다. 

또 하나 중요했던 일은 경험주의 철학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유생들이 공자왈 맹자왈 읊듯이 중세 유럽에서도 학문이란 고전을 숭상하며 거기서 정답을 발견하는 일로 알았다. 자연에 대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해답을 다 내 주었다고 생각했고, 또 그보다 더 뿌리깊은 것은 궁극적 진리는 성경에 나와 있다는 종교적 신념이었다. 고전이건 성서이건 결국은 어떤 권위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이 학문이었다. 그것을 거부하고 과학대혁명기에 나온 태도는 모든 것을 자기가 직접 확인하겠다는 경험주의였다. 경험주의자들은 권위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듣지 않을뿐더러 미신과 소문 등 남들이 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따르지 않았다. 

과학적 세계관은 실학 정신과 경험주의가 합쳐진 산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애써 배우려 노력해온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초이다. 그런데 요즈음 느끼는 아이러니는 서구문명의 본보기인 미국에서 과학적 세계관이 마구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 끌려서 현대화를 이룩한 우리는 그 꼴을 지켜보며 우리가 도리어 더 잘났다고 우쭐댈 것이 아니라, 나중에 똑같이 되지 않도록 잘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미국에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극히 무지한 국민이 많고, 온갖 허황된 음모설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코로나19 백신도 가장 먼저 최고로 개발해낸 나라에서, 그것을 못 믿고 맞지 않겠다는 인구도 엄청나게 많다. 옛날 공무원 시절 특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에서 공부할 값진 기회를 얻으셨던 필자의 아버님께서는 항상 미국을 찬양하면서 미국은 1%의 천재들이 99%의 바보들을 이끌고 가는 나라라고 하셨다. 필자도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국민 대부분은 좀 순진하고 멍청한 듯 했고, 소위 천재들이 만들어 놓은 훌륭한 사회적 체계 안에서 그냥 자기 원하는 대로 삶을 즐기며 잘 사는 것 같았다. (물론 비인간적으로 핍박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지만.) 

그 훌륭한 사회적 체계의 근본에는 과학과 기술이 깔려있었다. 그런데 근년에 다수의 ‘바보’들이 과학을 대표하는 ‘천재’들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가 퍼져버린 것이다. 이를 개탄하는 지식인들은 무지한 시민들을 지적 권위로 누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모든 학문과 지식인들을 깔보고 기분대로 떠드는 트럼프가 큰 인기를 얻어 대통령까지 했으며 많은 국민이 그런 종류의 후보들을 찍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복잡한 요인이 많지만 80년대부터 미국 공화당이 과학에 등을 돌리며 복음주의 기독교를 추종하고 경제적으로는 기업이나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생각해 온 탓이 크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과학문화 자체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험주의 과학은 공동체에 의존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개인이 혼자 다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서로의 진술을 믿고 또 서로 다른 의견과 판단을 대화로 절충하며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영국의 왕립학회 같은 기관들은 그러한 학문의 공유 공간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엘리트들만 서로 공유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일반인들을 대할 때는 권위를 세웠다. 자기들은 고전과 성경의 권위까지 부정했으면서도 말이다. 

민주사회에서 과학만이 동떨어진 엘리트의 영역으로 유지될 수는 없다. 과학대혁명기에 만들어낸 과학적 세계관을 이제는 모든 시민이 공유하고 거기에 기반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2의 과학대혁명이 절실히 필요하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