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한국이 만든 ‘세상에 없던 현미경’ MIT·하버드도 쓴다
입력 2021-08-27 00:36:00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⑤ 토모큐브
토모큐브 홍기현 대표(오른쪽)와 박용근 최고기술책임자가 24일 대전 토모큐브에서 살아있는 세포를 3차원 입체영상으로 관찰 가능한 홀로그래피 현미경을 소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일루미나가 유전체 분석 세계 1위 기업이라면, 토모큐브는 형태학적 세포 분석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서는 게 목표입니다."
홍기현(48) 토모큐브 대표의 얘기다. 토모큐브는 3차원 홀로그래피 현미경을 개발하는 벤처다. 올해로 설립 6년 차인 벤처 대표가 시가총액이 80조원을 넘는 일루미나와 견줘 포부를 밝힌 건 기술력에 자신이 있어서다.
■ 「 3D 홀로그래피 현미경 개발·창업
생체세포 변화 실시간 측정 가능
20개국 50여 대학·연구소서 구매
의료·화학 등 다양한 분야서 활용
」 이 회사는 말 그대로 ‘연구소 기업’이다. 현재 토모큐브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박용근(41)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가 연구소에서 실험하다가 본인이 필요한 장비(현미경)를 개발했고 창업으로 이어졌다.
박용근 KAIST 교수의 멋진 도전
학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세포를 관찰할 때 주로 사용하는 현미경은 형광현미경이다. 관찰하고자 하는 세포에 형광 시약을 주입하면 세포 내 특정 물질이 형광색을 띄는데, 이때 레이저를 투과해 관찰하는 방식이다.
형광현미경의 단점은 세포에 형광 시약을 주입해야 관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위적인 시약을 주입해 염색하거나 전처리를 하면 세포에 변형이 생길 수 있다. 형광현미경으로 5장 정도 촬영하면 아까운 샘플(세포)은 대부분 죽어버린다.
토모큐브는 염색·전처리를 거치지 않아도 3차원으로 세포를 분석·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을 개발했다. 생체세포는 구성 물질마다 고유한 굴절률 값이 있는데, 세포 내부 굴절률의 분포를 3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현미경이다. 덕분에 연구자 입장에선 별다른 전처리 없이 세포의 부피·질량의 변화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세포가 자연적으로 사멸하기 전까지는 수시로 세포 촬영이 가능하다.
이성수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형광 염색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포를 3차원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을 개발한 기업은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알츠하이머·루게릭 등 퇴행성 신경질환 연구에 토모큐브 현미경을 사용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세포 이미징 확보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토모큐브처럼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중도에 고사하는 연구소 기업은 수두룩하다. 기술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영 부분을 간과한 탓이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실리콘밸리에서 연간 창업하는 100만 개의 기업 중 단 4%만 생존한다"며 "사라지는 기업의 상당수는 기술만 과신한 기술 중심 기업인데 비해, 생존하는 기업은 기업가·기술자·관리자가 1인 3각으로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겨
토모큐브 연도별 매출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토모큐브는 다르다. 연구자(박용근 교수)의 실험실에서 창업 아이디어가 튀어나왔지만, 박 교수는 대표이사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라는 액셀러레이터(창업 초기 기업에 자금·컨설팅을 지원하는 업체)의 조언에 따라 본인은 CTO를 맡고, 경영은 홍기현 대표에게 넘겼다.
KAIST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홍 대표는 20년 이상 창업에만 몰두했다. 액정표시장치(LCD) 검사장비 벤처기업 애크론정보통신을 창업해서 2002년 나스닥 기업(포톤다이내믹스)에 매각했다. 이어 디스플레이 광학 검사 장비 제조사(와이즈플래닛)를 창업해 2012년 코스닥 기업(리캠)에 매각했다.
홍 대표는 두 차례의 창업 성공 노하우를 토모큐브에 접목했다. KAIST 창업원이 지원한 연구비(1억원)를 종잣돈으로 시제품을 만든 뒤, 3년간 제품 개선에 주력했다. 소비자·전문가에게 토모큐브 제품을 제공하며 보완점을 찾았다.
생물학을 전공한 직원을 채용해 사이언스팀을 발족한 이유 역시 소비자가 원해서다. 주로 생물학 유관 분야에서 연구·학술 활동을 하는 연구자들은 "토모큐브 현미경에 익숙해져도, 데이터 추출이 어렵다"고 피드백했다. 이들을 위해 토모큐브는 아예 이들의 연구를 돕는 연구원들을 채용했다.
박용근 CTO는 "지난해 토모큐브 현미경을 구입한 연구자의 논문에 토모큐브 사이언스팀 직원이 공동저자로 등재한 것만 40여 편"이라며 "이 수치는 매년 두 배씩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매사추세추공대(MIT)와 하버드대, 독일 암센터 등 20여 개국 50여개 대학·연구소가 토모큐브 현미경을 샀다. 지난 3월엔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토모큐브 현미경을 활용해 작성한 논문이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 셀바이올로지’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 이 논문이 유명해지면서 국내·외 10개 이상의 대학·연구소가 앞다퉈 토모큐브 제품 구매를 문의했다.
홍 대표는 "학술기관의 연구 장비 구매 프로세스는 통상 문의부터 구매까지 1년 반 정도 걸린다"며 "내년 매출액은 올해의 두 배 이상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선택 사양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토모큐브 현미경의 제품 가격은 개당 1억원 안팎이다.
현미경 1개 가격 1억원 안팎
이른바 연쇄 창업가가 경영을 맡으면서 거둔 효과는 또 있다. 외부 자금 유입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소프트뱅크벤처스·한미사이언스·데일리파트너스 등이 줄줄이 230억원을 투자했다. 박용근 CTO가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개발비 걱정 없이 일한다"고 말하는 배경이다.
활발한 투자금 유입은 다시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선순환 구조를 낳았다.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이 대세로 떠오르자 토모큐브는 서둘러 AI 인력을 충원해 기술 개발에 나섰다.
예컨대 구글의 자율주행자 전문기업 웨이모는 AI를 활용해 레이더·라이다 등이 인지한 사진·영상에서 사람·자동차 등을 식별한다. 토모큐브는 유사한 기술을 현미경에 적용해 세포를 식별한다.
또 페이스앱과 같은 AI 얼굴 편집 애플리케이션은 학습을 통해 얼굴을 인식하거나 변환한다. 토모큐브의 AI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사진·영상에서 세포 구조 정보나 세포 변화를 추론한다.
이처럼 AI 기술을 현미경에 적용하면서 정확성이 높아지고 식별 속도가 빨라졌다. 박용근 CTO는 "궁극적으로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모든 분석·진단을 스스로 담당하는 알고리듬을 접목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중견기업으로 성장을 꿈꾸는 벤처기업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초기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다. 토모큐브도 첫 고객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국내 연구자들이 국산 바이오·헬스케어 장비를 상대적으로 꺼리는 경향이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부 국내 기업·연구자는 기능·가격이 비슷하다면 국산보다 외산 장비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국내서 고객을 찾지 못한 토모큐브는 일본에서 첫 손님을 찾았다. 해외 연구자들에게 입소문이 난 이후 국내서도 제품 구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홍기현 대표는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의 국산 연구·의료 장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정부가 핵심 연구장비·의료기기에 대해 국산 제품 쿼터제를 일정 기간 도입해준다면 국내 기업의 시장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안정적인 직장과 대기업·공기업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벤처기업은 인재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측면에서도 토모큐브는 이례적이다. 경영진 스스로 "안정적인 인재풀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평할 정도다.
결은 네트워크의 힘이다. 3차원 홀로그래피 현미경은 일반인에게 생경한 분야다. 하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미 온라인상에서 네트워크가 긴밀하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박용근 CTO의 활약을 보던 사람들이 토모큐브 성장 과정을 곁눈질하다 제 발로 입사를 자원했다. 재직 중인 직원 45명 가운데 10명가량이 이 같은 경로를 통해 입사했다.
지난 3년간 퇴직 직원은 단 한 명
덕분에 최근 3년간 토모큐브에서 퇴사한 직원은 단 1명이었다. 홍 대표는 "수평적인 기업 문화와 야근 없는 분위기, 성과 보상에 대한 명확한 원칙도 낮은 퇴사율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토모큐브는 2019년 삼성증권과 상장 주관 계약을 체결하고 기업 공개(IPO)를 추진 중이다. 상장 후 유입한 자금은 의료 진단 시장과 산업용 검사 장비 시장 진출에 사용할 계획이다. 예컨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같은 바이오 기업은 미생물을 활용해 바이오 의약품을 생산한다. 이때 미생물 상태를 토모큐브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미생물을 보다 잘 배양할 수 있다는 것이 토모큐브의 설명이다.
화학제품 생산 과정에도 사용할 수 있다. 가령 일부 친환경 플라스틱은 미생물을 배양해서 생산한다. 미생물이 체내에서 플라스틱을 보다 잘 생산하는 데 토모큐브 현미경이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원준 KAIST 경영전문대학원장은 "혁신적인 원천기술은 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지고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쳐 또 다른 혁신을 유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며 "현미경 첨단 분석 분야뿐만 아니라, 이종 분야에 상당한 파급력을 미칠 수 있는 토모큐브의 원천기술은 한국의 혁신 경쟁력과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과학기술 교육과 정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앙일보] 미터법, 측정, 멘토링, 측정 단위, (0) | 2021.10.01 |
---|---|
[중앙일보] 과학, 과학의 의미, 과학용어, 용어번역 (0) | 2021.09.09 |
[중앙일보] 과학사, 과학 발전, 과학의 기원, 과학 선진국 (0) | 2021.07.05 |
[중앙일보] 기술과학 수준, 원자현미경, 현미경, 첨단 계측장비, 정밀 측정설비, 노벨상 (0) | 2021.07.05 |
[중앙일보] 멘토링, 과학자의 길, 젊은 과학자, 싱귤래러티 교수, KAIST (0) | 2021.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