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택환의 미래를 묻다] 10억분의 1m의 세계…기술의 한계를 넘어선다
입력 2021-11-15 00:36:00
나노기술의 미래
"상상해 보십시오. 국회도서관의 모든 정보를 각설탕 크기의 저장장치에 다 넣을 수 있고, 암세포가 몇 개가 겨우 생겼을 때 발견해 내고, 강철보다 10배 더 단단하지만 훨씬 가벼운 소재,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20년이 훨씬 넘게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나노기술에 지원하고자 합니다."
2000년 1월 20일 세계 정상급 공과대학인 칼텍을 찾은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남긴 역사적인 연설 중 일부분이다. 미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강국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 재임중 한 두 가지 중요한 미래 과학기술 분야에 ‘국가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전폭적 지원을 한다. 위의 칼텍 연설이 바로 ‘국가나노계획’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지난 20년 동안 한국을 포함,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가 나노과학기술에 많은 연구비를 투입해서 지원하게 되면서, 클린턴이 제시한 꿈만 같던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 「 mRNA 백신, 지질 나노입자 기여 난치병의 진단과 치료에도 활용 QLED·스마트폰에도 나노기술 배터리 효율, 그린수소에도 기여 」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에서 12인치 반도체 테스트 베드를 활용해 제작한 40나노 패턴 웨이퍼를 선보이고 있다. 나노종합기술원은 나노기술의 연구·개발에 필요한 고가의 시설과 장비를 구축,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정부 출연연구 기관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2020년 한 해 동안 거의 모든 지구인들의 일상생활을 멈추게 했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에 대응하는 백신의 접종률이 우리나라에서 70%를 넘어섰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모더나의 백신과 바이오엔텍이 화이자와 협력해 개발한 백신은 최초로 메신저 RNA(mRNA)를 활용한 것으로, 지질 나노 입자가 mRNA를 세포까지 안전하게 운반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mRNA 분자는 일상 환경에 노출되면 수 분 안에 파괴되기 때문에 포장과 운반이 까다로운 민감한 물질이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따르면 지질 나노 입자는 mRNA 세포 내 운반체로서의 효능이 높고 인체 내 부작용이 없는 특성을 가진 덕에 40여 종의 운반체 후보 물질들 중 선택되었으며, mRNA 기반 백신의 개발을 앞당겼다. mRNA 백신을 개발한 연구자들은 mRNA 운반체로 선택된 나노 입자의 성질이 mRNA 백신의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고 밝혔다.
난치병의 진단과 치료에 활용되는 나노기술은 앞으로 더욱 정교해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할 것이다. 나노입자가 세포막을 통과해 세포 안으로 들어간 것을 최초로 확인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이후 20여 년의 시간 동안 나노기술은 의학 분야에도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mRNA 백신의 예로 알 수 있듯이, 나노 입자는 크기가 충분히 작기 때문에 사람의 몸속을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다. 약물을 감싸서 운반하기에 적당히 큰 크기이기 때문에 환경에 맞게 조절을 한다면 약물을 전달하기에 최적화된 운반체다. 감싸고 있던 치료제가 질병 부위에 도달했을 때 풀려나오도록 설계하면 치료제 독성으로 정상 세포가 피해를 받는 것을 최소화하고, 질병 부위에 약효가 집중돼 치료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나노입자는 항암제와 같은 분자 수준의 작은 약물뿐만 아니라, 단백질과 같은 거대 분자까지 운반할 수 있다.
나노기술은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개념처럼 느껴지지만 생활의 곳곳에 나노기술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나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 스마트폰을 뜯어보면 소자라고 부르는 이미지센서·D램 등 반도체 칩들이 나온다. 소자는 다양한 소재로부터 제작되므로 좋은 휴대폰을 위해서는 좋은 소자가 필요하고, 좋은 소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소재가 필요하다. 나노기술은 원자 크기의 나노미터 단위에서 정밀한 조작을 가능케 하여 소재의 성질을 원하는 대로 조절하게 한다. 또한 나노기술은 다양한 분야에 적용 가능하다. 스마트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소자가 점점 작아져야 한다. 한정된 집적 공간 내에서 소자들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열에도 강하고 휘어져도 디스플레이의 성능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나노 입자만의 독특한 소재적 특성은 나노 입자의 크기가 물리적인 성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반도체를 수 나노미터 크기의 나노입자로 만든 양자점을 예로 들어 보자. 양자점에 자외선을 쪼이면 가시광선이 방출되고, 입자 크기에 따라 가시광선의 빛깔이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를 더 즐겁게 할 나노기술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구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점은 무엇일까. 영상을 실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정확하고 선명하게 화면에 구현하는 것이다. 양자점을 이용한 QLED 텔레비전의 선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입자들의 크기를 틀에 찍어낸 듯 균일하게 하는 나노기술이 필요하다. 크기가 7나노미터로 매우 균일한 양자점을 만들면 선명한 빨간색을 내게 할 수 있다. 반면, 양자점들의 평균 크기가 7나노미터라 하더라도 크기가 조금씩 다른 입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면 흐릿한 빨간색이 얻어질 수밖에 없다. 즉 균일한 나노 입자를 만드는 기술이 나노기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노 과학의 초창기에는 합성된 나노 입자의 크기가 고르지 못해 원하는 크기의 나노 입자를 체로 거르듯이 골라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나노 입자의 양은 매우 적고 손실이 많아 번거롭고 비싼 공정일 수밖에 없었다. 화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균일한 나노 입자를 손쉽게 합성하는 기술을 본 서울대 연구실이 개발할 수 있었고 나노 입자의 상용화에 큰 주춧돌을 놓았다.
나노기술은 오래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4세기 경에 제조됐다는 리쿠르고스 컵에는 유리에 금·은 나노입자가 들어 있어 빛의 각도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사진 대영박물관]
우리가 맞닥뜨린 기후변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차세대 에너지 및 환경 기술들 역시 나노기술의 도움으로 완전한 실용화의 목표에 점점 다가가고 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선 기존의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에너지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롭고 환경 친화적인 에너지 생성 및 변환 시스템으로 바꾸어 가야 하는데, 연료전지·배터리·태양광을 활용한 에너지 생성·저장 기술 등이 필수적이다. 차세대 에너지 기술들의 대부분이 화석연료 기반의 기술에 필적할 높은 효율과 가격 경쟁력을 갖추려면 여전히 많은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데, 나노기술은 핵심적인 도우미 기술로서 그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배터리의 경우 나노미터 크기의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다공성 구조나 속이 텅 비어 있는 나노 구조를 전극에 도입하면, 여러 번의 충·방전 때 성능이 떨어지는 문제를 상당 수준 해결할 수 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수소경제의 중심이 될 그린 수소를 생산하는데도 나노기술이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를 생산할 때 효율을 높여줄 수 있는 게 나노촉매다. 미국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원에서는 비싼 백금 촉매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철-질소화합물 기반 나노촉매를 개발, 연료전지의 가격과 효율을 개선하고 있다. 이처럼 나노촉매는 우리가 먼 미래라고 생각해 왔던 청정에너지 사회를 앞당길 수 있는 열쇠가 되고 있다.
■ ◆현택환「 1964년생. 나노입자 합성의 세계적인 대가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 어바나 샴페인에서 무기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 겸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로 일한다. 화학분야 세계 최고 저널인 미국화학회지 부편집장을 11년간 맡았다. 듀퐁 과학기술상(2005), 포스코 청암상(2008), 호암상(2012) 등을 수상했다.」
현택환 IBS 나노입자연구단장 겸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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