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과 경제

[전자신문] 한국 경제발전계획과 전자산업 발전

FERRIMAN 2008. 3.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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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10)태동기- 경제발전계획과 전자산업 발전
[ 2008-03-17 ]  
 박정희 군사정부는 처음부터 경제성장을 지상과제로 내걸었다. 집권 다음해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문제는 도로·항만·발전소 등 국가경제 인프라의 건설에 필요한 자본을 어디에서 확보하는지였다. 국내 자본시장이 빈약한 상황에서 정부의 공격적 외자유치는 경제성장의 숨통을 터줬다. 

 군사정부는 쿠데타가 성공한 지 두 달 만에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수석경제기구로서 경제기획원을 출범시켰다.

 경제기획원은 즉시 민주당 정부가 골격을 잡았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 보완해 이듬해 1월 13일 대망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사회간접자본투자와 기초산업육성으로 경제성장기반을 만드는 것이 1966년까지 예정된 1차 계획의 핵심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하기 불과 한 달 전 경제기획원은 외국자본의 무제한 도입을 허용하는 외자도입촉진법의 운용세칙을 제정했다. 자유당 시절에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하던 외자관리법과 외자도입촉진법을 강화한 것은 가장 큰 의미를 지녔다. 이전까지 국내에 들어온 외국자본은 대부분 미국이 일방적으로 사용목적을 정해주는 원조수입이었기에 제조업, 사회인프라에 계획적인 투자는 거의 불가능했다. 선진외국의 자본과 기술유치는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요소였다.

 경제기획원은 식민지배 경험 때문에 외국자본에 일종의 피해의식을 가졌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실로 파격적인 투자조건을 내걸었다. 기간산업용 자본에 대한 정부의 지급보증, 투자 과실송금에서 공정환율적용 등 좋은 조건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62년부터 외국기업과 자본의 국내 진출에 물꼬가 트였다. 경제기획원은 외자유치 과정에서 경험부족에다 의욕이 앞선 나머지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산업자본 확충이라는 명분 때문에 당장 빌리기는 쉬워도 이자부담이 높은 차관도입을 너무 많이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외자도입기업들의 원리금 및 이자 상환부담이 눈덩이처럼 불면서 차관망국론이란 우려까지 나오기도 했다. 결국 경제기획원은 1966년 금융부담이 적은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권장하는 외자도입법 제정을 거쳐 외자유치전략을 크게 수정했다.

 정부의 공격적인 외자유치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본 산업 분야는 전기·전자 분야였다. 당시 선진기술과 달러를 보유하고 있던 많은 다국적 전자기업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도약의 계기를 맞이한다.

 여타 중공업 분야도 외자유치로 기반을 마련했지만 전자산업은 기술집약적인 특성 때문에 외자유치에 가장 열심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과를 내던 1960년대 중반, 전자산업에도 100% 단독투자 또는 합작투자로 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속속 진출했다. 대표적 사례는 고미·페어차일드·산요전기·NEC·IBM·시그네틱스·모토로라·컨트롤데이터·도시바전기 등이다. 미국과 일본은 국내 전자산업에 뛰어든 외국기업의 양대축을 이뤘다. 하지만 두 나라의 기업은 처음부터 한국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랐다.

 미국기업이 한국에 진출한 근본적 이유는 저렴하고 우수한 노동력을 지닌 생산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반면에 일본기업은 수출지향적 경제를 갖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앞마당인 한국시장을 선점하자는 의식이 강했다.

 외국계 전자기업의 국내 진출 1호는 1965년 한미합작회사 고미산업이 트랜지스터·다이오드의 조립생산을 시작한 것이 시초다. 고미산업을 설립한 이석우 사장은 당시 동양인으로서 드물게 MIT석사까지 나왔고 미국 보스턴의 중소 반도체업체 고미에서 근무한 수재였다. 그는 인건비가 저렴한 한국에서 임가공을 하면 유리하다고 회사 측을 설득했다. 고미산업의 반도체 조립공장은 서울 마포 당인리 화력발전소 근처의 군대 천막 두 동에서 시작했다. 윤정우 상공부 전기공업과 통신계장은 고미산업을 방문했던 당시 먼지를 막기 위해서 군대 천막 안에 비닐을 깔아 놓고 수십명의 여공들이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상한다. 고미사의 국내 진출은 여타 미국 반도체 업체에도 소문이 알려져서 페어차일드·모토로라 등 쟁쟁한 미국기업이 한국공장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외국계 2호 합작회사는 66년 4월에 중앙상역이 미국 RCA 부품을 들여와 흑백TV 조립공장의 설립을 추진한 것으로 기록된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서 1965년 12월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앞선 전자기술에 목말랐던 국내 기업들은 앞다퉈 현해탄을 건너가 기술제휴를 요청했고 일본 전자업체들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됐다. 초창기 일본 전자업체의 자본유치를 끌어내는 데 전자부품사업을 하던 재일동포 곽태석 사장의 공이 가장 컸다. 그는 1969년 도시바와 제휴해서 한국도시바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한국도시바는 구미공장에서 트랜지스터와 흑백TV를 제조하면서 훗날 KEC로 성장했다. 곽태석 사장은 당시만 해도 최첨단 전자제품인 수정진동자를 국내최초로 생산한 써니전자를 비롯해 한육전자·신한전자 등 일본 전자업체의 한국 투자유치를 끌어낸 선구자였다.

 상공부 자료에 따르면 1965년 5월에서 1975년 5월까지 10년간 외자도입은 140건에 달했다. 이 중 전자산업은 단일 분야로 가장 많은 도입건수를 기록했다. 다국적 기업은 풍부한 자본과 첨단기술을 토대로 초창기 전자산업의 기반조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외국자본이 이 땅에 들어온 배경에는 밤새워 트랜지스터를 조립하던 여성노동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돼야 할 것이다.

◆외자유치의 이중성

 박정희정부가 자본과 기술을 들고 온 외국기업에 대해 항상 당근만 내건 것은 아니었다. 외국기업들의 내수시장 진입을 막고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적절한 채찍도 동원했다. 전자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조치는 상공부가 1966년 하반기 전자제품의 국산화를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일부 전자부품을 수입금지 리스트에 포함시킨 것이다. 또 TV용 부품수입자격도 수출가득률 40% 이상의 제품 생산자로 제한했다. 외산TV를 수입할 때 붙는 물품세를 30%에서 50%로 올리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외산부품을 들여와서 오디오·TV를 제작, 판매하는 중소기업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자부품 수입에 대한 정부의 까다로운 규제로 사업을 망친 중소기업들이 조직적 반발에 나섰다.

 흑백TV는 300여종의 전자부품이 집합된 최고급 가전기기로서 전후방 유발효과가 매우 컸기에 외자유치가 가장 활발했다. 1967년부터 동남전기는 일본 샤프, 한국마벨은 RCA, 천우사는 필립스 등과 각각 기술제휴로 흑백TV를 조립생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는 흑백TV제조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모든 합작투자업체들의 생산물량은 100% 수출만 하고 국내 판매는 엄격히 규제했다. 합작회사들은 흑백TV의 내수판매 허락을 집요하게 로비했지만 상공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덕분에 금성사를 비롯한 토종기업들은 가전시장에서 착실히 유통망과 기술력을 다지는 시간을 벌게 됐다.

 윤영기 상공부 전기공업과 통신계장은 “소니·내쇼날 등 일본 가전업체의 내수판매를 처음부터 허용했으면 오늘날 LG·삼성전자가 세계 일류 가전회사가 됐겠느냐”면서 보호정책이 불가피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1972년 이후 합작기업의 수출량과 한국인 지분비율에 따라서 내수판매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규제완화를 취했다. 어쨌든 한국의 전자산업은 외자유치와 자국 산업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종속이 아닌 자립성장의 길로 나서게 됐다.

 한국정부가 펼쳤던 적극적 외자유치와 자국기업보호 정책은 훗날 1990년대 초 개방에 나선 중국정부가 모델로 삼아 한국·미국·일본 전자업체에 그대로 적용해서 큰 성과를 거뒀다. 세상은 그래서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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