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과 경제

[전자신문] 전자산업 50년사(15)

FERRIMAN 2008. 4. 21. 20:43

ETnews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15)태동기-금성사와 구인회의 활약
[ 2008-04-21 ]  
 1957년 어느날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은 신규 사업으로 라디오를 국산화하겠다는 발상을 한다. 10년 전에 시작한 플라스틱 사출 사업으로 이미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됐지만 구 사장은 이 정도의 성과로 안주할 수 없었다. 그는 신규 사업으로 당시 생소하던 전자공업을 해보자는 생각을 굳혔다.

 미개척 분야인만큼 위험부담이 많았고 산뜻한 미제·일제 라디오와 경쟁이 되겠냐는 회사 내부의 회의론도 많아서 찬반 의견이 분분했다. 이듬해 봄날 구인회 사장은 형제들과 장남인 구자경 상무를 불러놓고 전자공업에 착수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구 사장의 결단은 금성사(현 LG전자), 나아가 오늘날 IT강국 한국의 전자산업을 있게 만든 역사적 순간이었다. 라디오 국산화를 목표로 1958년 10월 금성사가 설립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듬해 11월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이라 불리는 국산 라디오 ‘A-501’이 나왔다. 금성사는 라디오에 이어 최초의 국산 선풍기(1960년 3월)를 만들고 미국 시장에 라디오 수출(1962년 11월)까지 해냈다.

 1966년 9월에는 국산 흑백TV까지 만들어내서 한국 가전산업의 맏형으로서 위상을 굳혔다. 또 금성사는 1968년 민간업계 최초로 미국 뉴욕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해외진출도 추진했다. 비약적인 사세 확장에도 불구하고 구인회 사장은 사업현안 외에 정치권의 동향에 늘 노심초사했다. 후진국일수록 온갖 기업 활동이 정부의 결정에 오락가락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5·16 쿠데타 직후에 18명의 재벌급 기업인을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51억원이 넘는 환수액을 통보했다. 구속된 18명 가운데는 구인회 사장을 대신해 다섯째 아우인 구평회가 포함됐다. 군사정부는 임시특례법을 만들어 현금 대신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공장을 지으라고 했다. 이때 구인회 사장은 아세테이트와 테트론 등 화학섬유 공장을 짓기로 하고 정부승인을 받았다.

 금성사가 서독에서 화학섬유공장 설립 차관 도입이 마무리될 무렵 군사정권은 갑자기 전선공장을 지으라고 말을 바꿨다. 황당한 조치였다. 애당초 대한전선과 같은 회사들이 건재했기 때문에 전선공장을 굳이 설립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슬퍼런 시절이라서 모든 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구인회는 금속피복케이블의 국산화를 명분으로 다시 독일에서 차관 도입을 시도했다. 결국 정부 지시에 따라 62년 송배전용 및 통신용 전선생산회사인 한국케이블공업을 설립하고 서독 후어마이스터사에서 295만달러의 차관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외자도입법이 개정된 이후 정부가 승인한 최초의 민간차관이자 정부보증 없이 약속어음만 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일개 민간기업이 독일에서 무보증 차관을 얻은 것은 락희화학과 금성사, 구인회 사장이 쌓아온 신용 때문이었다. 이때 도입한 차관으로 구인회는 경기도 안양에 한국케이블공업의 공장을 짓고 이와 별도로 부산 온천동에 종합전기전자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한국케이블공업은 설립부터 대한전선 등 기존 전선업체의 큰 반발에 직면하면서 수익성이 가시밭길을 걸었지만 정부는 이를 강행했다.

 군사정부는 반대 급부로 대한전선에 라디오·TV·냉장고 등 금성사가 사실상 독식하던 가전사업을 허락했다.

 한국케이블공업은 이후 여러 차례 서독에서 정부 및 민간차관을 끌어냈다. 금성사 역시 지멘스 등에서 교환기와 전화기 생산을 위해 수천만마르크의 차관을 도입했다. 구인회의 적극적인 독일 자본 유치는 한국과 서독 정부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1967년 독일 뤼프케 대통령의 방한 시 금성사의 부산 온천동 공장 방문일정이 포함되기도 했다.

 구인회 사장은 잇따른 정치적 외풍에서 기업 활동을 지켜줄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절실히 필요했다. 여타 재벌기업들도 사업 기반이 정치권의 입김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정치권과 줄을 놓아야 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기업인 자신이 직접 뛰어들거나 인척을 통해서 국회에 진출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락희그룹 구인회의 넷째 아우 구태회가 1958년 총선에 여당 후보로 나간 것은 큰 형의 이런 생각을 헤아린 결과였다.

 구태회는 이때부터 1980년까지 여당 6선의원을 지내면서 국회 부의장까지 올라갔다. 석유화학과 전자전기 분야를 그룹 주력사업으로 밀어붙이던 구인회에게 동생 구태회의 정계 진출은 큰 힘이 됐다.

 1967년을 전후해서 구인회의 락희화학과 금성사는 비약적인 사업 확장을 꾀했다. 신규 사업분야는 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석유화학공업 분야 진출도 성사됐다. 당시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서 유공의 정유능력이 한계에 달할 것으로 보고 제2정유공장을 짓기로 했다.

 락희화학과 미국 칼텍스가 합작해 설립한 호남정유는 치열한 경쟁 끝에 1966년 11월 제2정유공장 사업을 따냈다. 이로써 락희그룹은 석유화학 분야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히게 됐다.

 한국케이블 공업은 1966년 금성사에 합병됐다가 1969년 금성전선으로 재분리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 금성사는 전화기와 EMD식 자동교환기 생산을 담당하던 통신사업 부문을 금성통신으로 분리했다. 이로써 락희그룹은 화학공업 및 전기전자통신공업 분야의 종합그룹으로 면모를 갖췄다.

 한국케이블을 인수, 합병한 금성사는 이미 직원 수 3000명을 넘어서는 대형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락희그룹 회장 구인회는 5사 외에 호남정유·금성전선·금성통신·한국콘티넨탈카본·호남전력·금성판매·경남일보·락희개발 등 8개 계열사를 추가로 설립하거나 인수하고 자신의 아호를 딴 연암문화재단을 발족시켰다.

 1969년 2월에는 그룹본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옮겼다. 사세가 커지자 금성사는 1966년부터 제품별 생산규모의 증가에 따른 부문별 관리를 위해 선진국 기업에서 쓰던 사업부제를 도입했다. 구인회 사장은 1967년 금성사의 관리 수요가 커지자 민간기업 최초로 회사 운영에 컴퓨터를 도입하라고 지시했다. 1969년 11월 IBM360 모델이 금성사의 전산실에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1931년 포목점인 구인회 상점에서 출발했던 구인회는 불과 30년 만에 한국최고의 가전기업, 화학기업을 갖춘 제일의 기업가로 성장했다. 구인회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라디오 국산화로 한국 전자산업의 초석을 세우는 통찰력을 가졌지만 말년에 병마와 싸워야 했던 자신의 운명만은 예측하지 못했다.

 한창 사업활동에 바쁘던 구인회 락희그룹 회장은 1969년 뇌관종양으로 갑자기 입원했고 몇 달 뒤 12월 31일 0시 1970년대를 접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한국 제일의 기업인으로서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사후 금성사는 한국 전자산업의 선두 자리를 놓고서 삼성이란 맞수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구인회의 선진경영 철학, 구태회의 활약�

구인회가 우리나라 전자산업에 남긴 족적은 지대하다. 경상도의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나이 스물 다섯에 고향 진주에서 구인회 상점을 열었다. 그는 거듭된 실패 끝에 화장품 럭키크림을 만들면서 사업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화장품 용기로 시작한 플라스틱 사업으로 엄청난 거부가 됐다. 여기서 만족했다면 구인회는 그저 성공한 옛날 기업가로 기억됐을 것이다.�

 구인회 사장이 초창기 전자산업 진출을 발표하자 이에 대한 락희그룹 내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과감한 승부사 기질로 라디오 국산화를 밀어붙였다. 결국 국내 최초의 라디오와 TV, 냉장고가 쏟아졌고 금성사는 창립 10년 만에 매출이 200배 이상 늘어났다.�

 1963년에 금성사에서 처음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을 때 구인회는 노동조합의 실체를 인정하고 임원들의 권위주의를 지적하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경영철학을 보였다. 당시 원조물자에 기대어 성장한 여타 재벌기업에 비해 금성사의 기업 이미지가 국민에게 비교적 좋았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구인회 사장의 소탈한 성품은 금성사의 기업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성사의 가전제품은 세탁기, 라디오 등 주로 실용적인 제품에 주력했다. 라이벌 삼성이 이병철 사장의 세련된 취향을 반영해 일찍부터 첨단 제품과 화려한 부가기능에 눈을 돌린 것과 상반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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