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대국’의 비밀 … 일본은 기술보다 시장을 키웠다
신성장동력 찾아라 (上) 신기술보다 신시장이다
전남 영광군 홍능읍 성산리엔 3000㎡의 부지가 잡초만 무성한 채 방치돼 있다. 이곳은 원래 태양광 발전업체인 벤엘솔라파크가 공장을 짓기로 했던 땅이다. 하지만 자금난으로 사업을 포기하는 바람에 이 모양이 됐다. 태양광 발전사업을 추진하다 버려진 땅은 영광군에만 68곳이나 된다. 정부는 2002년 신성장 동력 찾기의 일환으로 ‘발전차액 지원제도’를 도입, 태양광 발전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태양광 전기를 만들 경우 정부가 시장가격보다 더 비싸게 사주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958개 업체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현재 가동 중인 곳은 456개에 불과하다. 정부가 예산 부족으로 지원을 축소하기로 하자 업체들이 잇따라 사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도 문제지만 기업들도 별 고민 없이 미래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정성철 원장은 “국내 기업들이 그동안 보여준 신성장 동력사업 발굴 노력은 일종의 유행 좇기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유망한 사업이라고 소문이 나면 철저한 시장 분석을 하거나 치밀한 전략을 짜기보다는 우선 발부터 담근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진출에 이어 바이오와 나노 투자, 최근의 대체에너지 사업 진출까지 기업들의 행태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얘기다. 코리아디지털콘텐츠연합회의 전충헌 회장은 “적지 않은 기업이 첨단기술과 신성장 동력 사업을 혼돈하고 있다”며 “신산업 진출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되는 것은 ‘시장의 흐름’과 ‘소비자의 변화’를 꿰뚫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배우자=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외곽에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클러스터인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 이곳의 관문은 삼각형 모양으로 우뚝 솟은 유리건물이다. 로비에 시스타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물을 빼면 일반 오피스 건물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세계 최고 기술의 산실로 유명하다. 인구 900만 명에 불과한 스웨덴이 무선통신과 의료 분야 등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아 낸 곳이다. 이곳의 비영리 재단인 스팅(STING)이 아이디어는 있지만 마케팅 역량이나 자본이 부족한 기업을 골라 키운다. 매년 응모하는 600여 개 기업 중 독창적인 사업 아이디어가 있는 신생 업체 50개를 선정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다. 이렇게 까다로운 선정 기준은 뭘까. 한마디로 ‘시장성’ 여부다. 애니카 잉글룬트 공보담당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신기술이라도 시장성이 없으면 뽑지 않는다”며 “이렇다 보니 선정한 기업 중 매년 10~20개사가 세계적인 상품화에 성공한다”고 자랑했다. ‘아이디어를 세계시장에(Where Ideas Go Global)’가 스팅의 모토다. 좋은 기술과 훌륭한 아이디어 상품이 세계시장에 선보여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가장 큰 역할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 국가의 신성장 동력이 되는 셈이다. 신성장 동력 찾기에서 시장성을 최우선 고려한다는 점에서는 핀란드의 테크노폴리스도 비슷하다. 이곳의 입주 기업 선정 기준은 ‘글로벌 상품성’이다. 핀란드는 인구가 스웨덴보다 훨씬 적은 약 600만 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내수시장만으로는 상품성이 없다고 보고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른다. 핀란드 전역의 13개 테크노폴리스에서 매년 300개 기업이 응모하지만 60여 개만 선정된다. 테크노폴리스의 메르비 카키 담당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컴퓨터 보안업체인 F 시큐어 등 유명 기업이 이곳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같이 스웨덴·핀란드의 신성장동력 발굴 원칙은 철저하게 시장성과 글로벌 상품성이다.
◇시장 키우는 게 정부 역할=199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무인자동차 부문에서 프랑스·독일·일본에 뒤졌다. 이를 단번에 역전시킨 곳이 바로 미 국방부다. 국방부는 2017년까지 공격 무기를 갖추고 자유 주행이 가능한 전투차량 개발을 목표로 업체를 선정했다. 그런데 이전 단계(2004∼2012년)에서 무인차량 구매 자금으로 책정한 정부 돈만 17억 달러(약 1조7331억원)에 이른다. 이 같은 국방부의 엄청난 투자에 힘입어 미국은 무인차량 개발 분야에서 독보적인 1위에 올랐다. 태양광 발전 분야에서 가장 앞섰다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관련 예산 70% 이상을 기술 개발 분야가 아닌, 시장을 육성하는 양육비로 썼다. 일본 정부는 70년 초 오일쇼크 이후부터 태양광 에너지를 미래의 대체 에너지로 선정해 국가전략 산업으로 집중 육성했다. 일본도 처음엔 정부 차원에서 태양광 기술개발 투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턴 태양광 에너지 시장을 인위적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태양광 에너지 기술이 발전해도 전력이나 원자력에 비해 생산 원가가 비싸 태양광 에너지가 급속히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일방적인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자제했다. 그 대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뒷받침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테면 주택건설업자가 지붕에 태양광 에너지 발전 시설을 설치하면 인센티브를 주고, 이 주택을 구입하는 사람에게는 시설비를 모기지론에 포함시켜 주는 식이었다. 고려대 김동환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일본이 태양광 에너지 강국이 된 것은 정부가 태양광 에너지를 사용하면 어떤 이익을 볼 수 있는지를 시장에서 널리 알리고 일관되게 실천하는 정책을 편 결과”라고 말했다. ◇피라미드 밑바닥도 봐라=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은 ‘상상력 돌파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이디어당 5000만∼1억 달러의 부가가치를 낼 만한 사업을 찾는다. 황수 GE 코리아 사장은 “무에서 유를 찾는 게 아니라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인류 중 절반 이상이 2025년이면 물 부족에 시달릴 것을 고려한 담수화 사업 진출도 여기에서 나왔다. 또 가채 매장량이 석유(약 40년)의 6배 이상 많은 석탄에서 오염발생물질을 줄이는 신기술(IGCC)도 개발됐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가 있는 세계자원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서는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 수준인 국가의 소비자들을 ‘피라미드의 밑바닥’이라고 지칭했다. 브라질·인도네시아·인도·카메룬·타지키스탄 지역 인구만도 40억 명에 달한다. 개인 소득은 낮지만 이들을 모두 합치면 5조 달러에 달하는 시장을 주목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추광호 미래산업팀장은 “초저가 히트상품의 공통점은 기술보다 상품성을 냉철하게 따진 제품들”이라며 “품질과 브랜드까지 결합한 ‘초저가 명품’은 엄청난 시장 파괴력이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표재용·안혜리·장정훈 기자,김민성 전경련 미래산업팀 연구원, 임영모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공동기획=전국경제인연합회·삼성경제연구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