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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두 과학디자이너가 남긴 '위대한 유산' HAL

FERRIMAN 2008. 8. 22. 08:44

두 과학디자이너가 남긴 ‘위대한 유산’ HAL … 꿈과 현실로서의 2001년 컴퓨터 2008년 08월 22일(금)
영화나 만화, 소설 등에 보이는 허구성은 모두 작가에 의해 창조된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허구성의 이면에는 개연성이 있다. 어떤 매체의 이야기나 이미지가 합리적이라거나 타당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과학적’이라고 하는 보편타당함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창조적 상상력이 가득한 과학영화, 만화, 소설 등에서 보이는 가상의 문제와 이에 대한 인간의 해결방안이 합리적이고 바람직한지 과학기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편집자 註]

과학미디어로 읽는 미래 무리에서 따돌림 당해 홀로 남겨진 어떤 원숭이가 있다. 이 원숭이 앞에 자연상태에서는 볼 수 없던 검은 비석 하나가 나타난다. 어떤 신비한 영감을 느낀 원숭이는 우연히 동물의 굵직한 허벅지 뼈를 쥐고 땅을 툭툭 쳐본다. 도구가 된 묵직한 뼈는 주먹과 팔목에 그득한 힘을 전한다. 두 팔로 땅을 짚던 원숭이는 도구를 쓰면서 직립보행을 시작한다. 도구를 쥐고 거대한 물소를 때려눕힌 원숭이는 이제 무리에게 육식을 제공한다.

▲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장면 

영감을 가진 이 원숭이는 무리의 지도자가 된다. 도구를 쓰는 이들 무리는 또 다른 무리를 무력으로 제압한다. 원숭이가 사용하던 허벅지 뼈는 2001년에 와 우주정거장이 된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이 자연진화는 다음 단계를 앞둔다. 인류 이후 인류와 대결할 보다 진화된 존재는, 기계-컴퓨터다. 목성탐사를 시작한 인류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과 대결한다. 결국 인간은 모두 죽고 기계는 재부팅 후 살아 남는다. 기계에게는 인간만이 가진 '죽음'이 없다.

흔히 ‘공상과학영화’라고 부르는 '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 'SF영화'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콩글리쉬다. SF는 샌프란시스코의 약어다)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2명의 거장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작가 아서 클라크가 그들이다. 과학적 상상력에 있어 두 거장의 업적은 감히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와 이미지로 새로운 종을 창조

이들은 우주선을 만든 적도 새로운 종을 창조한 적도 없다. 다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를 그려내 책과 필름에서 우주선 제작자, 종의 창조자가 된다. 과학기술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는 영화 등의 매체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위대한 과학디자이너인 이들 거장들에 대한 찬사는 다음 기회에 천천히 다루기로 하자.

두 거장이 만나서 만든 걸작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역시 과학영화의 모범으로 정평이 나있다. 영화는 139분에 달하고 각 장면은 무료하기 이를 데 없다. 과학기술에 몸담고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나, 그 ‘포스’에 눌려서라도 피하기 어려운, 졸음과 싸워이겨야만하는 어려운 작품 중에 하나다. 널리 알려져 있듯, 거장 디자이너들은 이 영화에서 '클락 궤도'라고 불리는 지구정지궤도(geo-stationary orbit)를 통해 위성통신을 고안해 냈다.

화면을 보면서 대화하는 화상전화, 각종 개인식별장치는 물론, 우주정거장을 고안해 사람들에게 현실감 있게 1968년(!)에 그려보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상상력은 인간과 대결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기계-컴퓨터 HAL을 묘사한 것이다. 영화에서 HAL은 깜빡이는 붉은 불빛으로만 나타나고 인간의 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두 거장은 인공지능이 어떤 논리를 구사할 것인지, 어떤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을 뚜렷히 제시하고 있다.

1968년에 인공지능을 묘사

영화가 극장에서 막을 내리고 30년을 조금 못 채운 1996년, 아서 클라크는 책 한 권을 펴냈다.〈HAL의 유산 : 꿈과 현실로서의 2001년 컴퓨터(HAL'S LEGACY: 2001's computer as dream and reality)〉라는 두툼하고 넓은 책이다. 책은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한 HAL-정확하게는 HAL9000-이 현실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책이 나올 당시까지의 기술력으로 어느 정도로 가깝게 HAL에 가까운 컴퓨터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더 연구해야 할 이슈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다룬다. 필자들은 당대 해당 기술 분야에 전통한 미국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책의 전문 일부는 아직도 MIT출판부 사이트(mitpress.mit.edu/e-books/Hal/contents.html)에 공개돼 있다. MIT출판부는 책에 대한 개정증보판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또 각 세부분야의 학술적 업적들이 더 발전되면 인터넷 상 책의 내용도 인터액티브하게 발전되도록 하고 있다. 〈HAL의 유산〉은 HAL을 중심으로 인공지능 기계-컴퓨터에 대한 논쟁꺼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아서 클라크는 최근 사망했지만, 전 세계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이 책을 통해 HAL의 구현을 위해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 때문에 〈HAL의 유산〉은 위대한 과학기술 디자이너들이 전해 준 인류를 위한 또 하나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HAL이 컴퓨터 과학에서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과학기술자들의 관심은 지금까지도 지대하다. HAL의 구현은 인류가 만들어낸 기계의 진화와 괘를 함께한다. 동시에 단순히 한 영화에 제시된 캐릭터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가 만들어낸 컴퓨터과학의 핵심 학술이슈이며, 아직까지 그 구현을 두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로망'으로 자리잡고 있다.

과학적 창작력을 통해 만들어진 많은 캐릭터들은 작품 속에 갇혀 사장돼 왔다. 그러나 HAL에 대한 과학기술자들의 열망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공지능과 기계-컴퓨터와의 대화를 위한 연구 핵심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영화의 창조적 이미지를 과학기술 이슈로 삼고 있는 세계 과학기술자들의 유연하고도 질긴 사고방식은 분명 참고할만 하다.

과학자들의 로망 ‘HAL’의 탄생

▲ HAL의 유산 : 꿈과 현실로서의 2001년 컴퓨터. 
HAL은 1968년 당시 컴퓨터 대명사였던 'IBM' 브랜드의 각 이니셜 첫 한 글자씩을 한 자씩 '앞선' 알파벳으로 구성해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컴퓨터보다 '한 발 앞선' 컴퓨터라는 암시다.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컴퓨터’에서 한 발 더 나간 컴퓨터의 핵심 능력, 아서 클라크는 이를 인공지능이라고 보았다. 이 책에 다루는 이슈는 크게 △슈퍼컴퓨터 디자인 △컴퓨터 오류 극복방안 △인공지능의 게임능력과 대화 △컴퓨터와의 대화(음성인식, 음성출력 및 영상인식) △HAL의 상식과 마음, 감성 △미래 기계와의 공동작업(human-machine interaction) △컴퓨터의 계획 능력 △컴퓨터가 행한 살인에 대한 윤리 등이다.

HAL의 목적은 승무원이 탄 우주선을 무사히 목성까지 보내는 데 있다. HAL은 이 과정에서 우선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승무원들을 살해한다. 우주선의 여러 장치들을 이용해 사람을 유도하고, 감금하고, 질식시키는 방법 등을 사용한다. 반드시 어떤 목적을 이뤄야 한다고 할 때, 인간은 하다가 그만 두자거나 다른 방안을 마련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는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우선된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물론 영화에 나온 HAL은 대단히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목적의 타당성 여부까지 판단하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기계가 사람을 살해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인공지능을 만들어야 할까. 이 문제는 아시모프의 로봇법칙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 로봇법칙 역시 법칙 내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는 무수히 많다.

〈HAL의 유산〉을 편집한 데이비드 스톡(David G. Stork)은 인공지능의 이러한 면을 논리구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로 판단했다. 살인은 원하지 않는 결과이기 때문에 오류라는 것이다. 오류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어느 정도까지의 오류는 허용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이상의 오류는 허용할 수 없느냐는, 그 선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성을 가야 한다는 명령과,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을 때 “목성은 가되 인간을 죽여야 한다면 목성항해를 중단해야 한다”고 정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일부 우주인들이 다른 우주인들을 죽이기 위해 목성항해를 중단시킨다”고 할 경우나, “우주선을 납치해 토성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경우 등 인간의 다양한 목적과 배치되는 논리는 언제든지 만들어 질 수 있다. 확장해서 생각하자면, 인간의 사고와 같은 경우의 수를 가지거나, 사고방식, 마음, 신념, 사상 따위의 사고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HAL과 같은 자율적인 판단을 하는 인공지능은 영원한 오류를 지니게 된다.

인간은 '지능적'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지능적인 범죄’라는 말은 흔히 쓰지만, ‘지능적인 선행’은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역시 이런 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세탁기나 텔레비전 등의 가전기기에 인공지능이 탑재돼 있을 때라면 오류가 나봐야 기껏 옷을 버리거나 원하지 않는 채널을 녹화할 뿐이다. 그러나 인텔리전스 빌딩에 오류가 나게 되면 사람들이 고층 엘리베이터에 갇히거나, 치명적으로 문에 끼이거나, 화재를 막지 못하는 등의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주식시장을 다루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수 만 명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거나 어떤 국가는 경제가 파탄날 수 있다. 인공지능으로 제어되는 교통신호 체계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물류가 정지되고 끔찍한 교통사고가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게 된다. 책에서 논의되는 인공지능의 오류에 관한 논의는 이에 따라, 컴퓨터나 프로그래밍의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답은 이 책에 없으며 다른 책에도 아직 없으며,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동안 인간의 주변에서 발생 가능한 문제로 지적될 것으로 보인다.

인공지능의 오류와 윤리문제

HAL이 가진 뛰어난 능력에는 HCI(human-computer/machine/robot interaction)가 있다. HAL은 사람의 말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적절하고 가장 합리적인 답변을 인간이 쓰는 말로 내놓는다. 마치 사람과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갈 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술모양을 읽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적절한 수준으로 체스를 두기도 하고, 우주선 내 어느 곳에서든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놓는다.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HAL의 뛰어난, 그러나 두려워하는 점이 바로 이 HCI능력이다.

인간과 기계간의 대화능력을 연구하는 HCI 분야는 20여 년 전 마우스나 키보드 등을 개발해냈다. 최근에는 인간의 대화와 거의 유사한 음성입출력 방식 등을 개발해냈다. 키보드보다는 손으로 쓱쓱 써도 기계가 알아먹거나, 간단하게 말만하면 기계에 입력이 되고, 문자로 된 글을 기계가 자연스러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인간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키보드로 글을 쓰는 것에, 전화로 대화하는 것보다 문자메시지를 남기는 것에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 사이 기계에 대한 의존도, 더욱 솔직해지자면, 충성도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회자되는 유비쿼터스 컴퓨팅(ubiquitous computing)은 언제 어디서든 정보와 접속하고 환경이 컴퓨팅을 제공하는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기계에 의해 인간의 행동과 정보를 감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정보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을 때도 기계가 이를 알아채거나 기록한다고 가정하면, 공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환경을 대단히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기계가 제공한다면 테크노포비아는 극에 달한다. 영화에서의 상황은 인간이 심심풀이로 한 말이나 인간간의 비밀스러운 대화까지도 기계가 추적해 내의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사실상 기계가 인간의 정보를 장악,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결국 기계의 목적에 따라 인간 생존권이 위협 받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나온, 아서 클라크가 예견한, HAL의 생일은 ‘1997년 1월 12일’, 출생지는 미국 일리노이주 얼바나다. 물론 작가도 책이 나온 1997년, HAL의 탄생을 보지 못했지만 책 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바람을 내비쳤다. 영화 이미지를 넘어서서 〈HAL의 유산〉으로 “2001년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컴퓨터가 연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HAL의 출현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 있고, 더욱 뛰어난 인공지능을 탑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과학기술적 유산과 달리, 인공지능은 ‘지능’이라는 점에서 ‘인간을 위한’이라는 과학기술의 인문학적 가치를 포함해야 하는 과제를 가진다. 두 과학디자이너가 인류에게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 바로 이것 아닐까.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 |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 | 스탠리 큐브릭,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 지음 | 139분 | 1968

HAL의 유산: 꿈과 현실로서의 2001년 컴퓨터(HAL'S LEGACY: 2001's computer as dream and reality) | 데이비드 스트록(David G. Stork) 편집, 아서 클라크 감수 | MIT출판부 | 384쪽 | 1996

박상주 객원기자 | utopiapeople@naver.com

저작권자 2008.08.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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