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국산 라디오 '금성 A-501' 개발 박정희 대통령이 판로 개척 지원 2008년 10월 09일(목)
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1959년 3월 1일 문을 연 ‘원자력연구소’의 영향으로 과학기술계가 생기를 얻으면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학회들도 잇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던 한국에서 미국 PX를 통해 흘러나온 진공관 라디오는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플라스틱 상자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가격도 비쌌다. 최고급 라디오로 치던 미국 제니스 라디오는 암시장에서 45만환에 팔렸는데, 이는 당시 쌀 50가마 가격이었다. 국산 라디오 만들기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LG그룹을 창립한 고 구인회 회장이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한 구인회 회장은 ‘럭키크림’, ‘럭키치약’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57년 금성사(現 LG전자)를 설립하는데, 구 회장의 마음 속에는 라디오가 들어 있었다.
임원들이 “기술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구 회장은 이 말을 듣고 “기술수준이 낮으면 외국에 가서 배워오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외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며 임원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임원들은 수입 라디오를 수리하던 전파사 사장들을 엔지니어로 임명하고, 라디오 설계를 맡긴다. 수입 부품을 사올 자금이 모자라 대부분의 부품을 직접 제작했다. 그리고 개발을 시작한 지 약 1년여 만인 1959년 11월 15일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이 출현한다. 첫 해 생산량은 87대, 가격은 2만환이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금성사 직원의 월급이 약 6천환이었는데, 세 달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미군 PX를 통해 시판되던 제니스 라디오에 비해서는 훨씬 싼 가격이었다. 이처럼 싼 가격(?)에 국산 라디오를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헌조 고문은 “하루종일 청계천 일대의 전파사를 돌아다녔지만 상인들은 국산 라디오를 어디에 쓰겠냐며 머리를 가로저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시장에서 고전하던 금성 라디오를 살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 대통령은 곧 부산 연지동에 있던 금성사를 방문, 실무자에게 “어떻게 하면 전자산업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당시 설계 책임자였던 김해수 과장이 “밀수품과 미국 면세품 유통을 막아야 살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 말을 듣고 곧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1만대도 못 미치던 라디오 생산량이 13만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힘을 얻은 금성사는 라디오 성능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제에 버금가는 라디오로 품질을 높여나간다. 라디오를 통해 한국의 전자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 과학기술사의 중요한 사건으로서, 과학기술정책연구원(KISTEP)은 금성 라디오 개발을 한국 과학기술사 두 번째 업적으로 올려놓고 있다. |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8.10.0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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