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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한미 양국정상의 공동성명과 KIST 설립

FERRIMAN 2008. 10. 22. 11:29

백악관 뜰에서 공포된 KIST 설립안 한미 양국정상 종합연구소 설립 공동성명 2008년 10월 22일(수)

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사실 50년대까지 ‘과학기술’은 정부나 정치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마지막 시기였던 1960년 2월 자유당 간부와 정부 각료들은 연석회의를 갖고 9개항의 공약을 합의했는데, 9개항 중 마지막으로 제시된 것이 ‘과학진흥의 향상’이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상 최초로 제시된 이 과학진흥 공약은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 급조된 것이었다. 자유당이 4.19혁명으로 종말을 고하자, 과학진흥 공약도 곧 과거로 사라졌다. 자유당에 이어 등장한 민주당 역시 정치적 혼란으로 과학진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여유가 없었다.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어 간 것은 1960년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였다. 군사정부는 과학기술 문제에 있어 이전의 정부보다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해 잘 살아보자”란 슬로건을 내건 군부는 경제 번영을 첫 번째 목표로 내걸었고, 이는 곧 과학기술 진흥으로 이어졌다.

군부가 설치한 최고 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연구소 설립을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차관이 위원장을 맡고, 국내 중진 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종합자연과학연구소 설립연구위원회를 1961년 9월 구성한다.

▲ KIST 설립 전 서울 홍능 부지(현재의 연못자리) 
그리고 위원회는 ‘한국과학기술원(가칭)’ 설립 계획안을 보고했는데, 계획안에 따르면 과학기술원은 국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지만 국공립 형태가 아닌 특수법인 형태로 민간 연구소를 지향하고 있었다.

최고회의는 과학기술원 설립에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계획안을 검토한 지 얼마 안돼 내각수반 소속으로 과학기술원을 설립키로 하고, 연구원 설립과 관련된 자료수집과 조사연구를 위해 1961년 11월 과학기술원설립위원회 규정을 제정한다.

규정에 따르면 각 부처에 산재해 있던 과학기술 기관들을 과학기술원으로 모두 흡수 통합하고, 새로 구성될 과학기술심의위원회가 전체 연구기관의 연구방향을 조정하도록 하고 있었다. 단순한 연구기관이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과학기술 연구 활동을 종합 조정할 수 있는 행정기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안에 발표되자 기존 연구기관의 통합에 대해 각 부처가 난색을 표명한다. 과학기술계 역시 과학기술원 설립(안)을 놓고 논란이 이어졌다. 기술원 설립시 소요될 재정 조달문제와 함께 과학기술 각 분야에서 이견과 논쟁이 촉발되면서 과학기술원 설립(안)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몇 개의 국공립 기관을 제외하면 연구기능을 가진 기관은 대부분 작은 규모였으며, 연구실적도 매우 미미했다. 국공립 기관이라 해도 중앙관상대, 국립지질연구소, 국립보건원, 국립수산진흥원 등과 같이 연구가 주기능이 아닌 행정 중심의 기관들이었다.

경제개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종합연구소의 필요성이 또 다시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술지원을 위해 신설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1963년 여름 상공부장관 명의로 경제각료심의회의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법(안)을 상정한다. 이 법안의 기본 취지는 국립공업연구소를 개편해 특수법인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 산업발전을 위한 기술센터로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정부 안팎에서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힌다. 특히 연구소 민영화 방안에 대해 내부의 거부감이 거셌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이 법안은 보류된 채 제3공화국 출범 후 법에 따라 자동 폐기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법(안)이 폐기되면서 중단된 연구소 개편 시도는 국립공업연구소 개편 논쟁이 대통령에게 알려지면서 다시 시작됐다. 그동안의 연구소 개편 노력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9월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국립공업연구소, 원자력연구소,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통합, 개편해 종합적인 과학기술연구소를 창립하는 안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대통령 지시에 따라 연구기관 실태조사를 실시한 후 “성격이 다른 세 기관의 인위적인 통합보다는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주축으로 하는 재단법인 형태의 새로운 연구소를 창설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기획원은 이 보고서에서 “국영기업체들의 보조를 확대하고, 민간 기업으로부터 자금을 보조받아 산업생산과 직결되는 연구개발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 종합연구소 설립에 관한 한미 양국 정상의 공동성명 장면 
이 방안에 대해 해당 기관과 관계 부처 책임자들이 동의를 표함에 따라 새로운 종합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방안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연구소 설립을 위한 재정 문제와 연구개발을 수행할 인력 문제가 큰 암초로 떠올랐다. 당시 상황에서 재정과 인력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는 정부로서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1965년 5월 열린 존슨(Lyndon B. Johnson) 미 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은 난제가 됐던 재정 및 인력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면서 종합연구소 설립을 현실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백악관 뜰에서 열린 양국 정상의 공동성명서 발표 내용 중 “양국 정부가 종합연구기관 설립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삽입된 것이다.

60~70년대 한국의 산업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국내 최초의 종합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양국의 협조 속에 KIST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8.10.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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