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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FERRIMAN 2008. 12. 1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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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사랑하기에,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오랜만에 보고팠던 얼굴들을 만났다.

모임은 송년회라기보다 말 그대로 망년회였다. 내게도 올 한 해는 지독한 치통을 앓는 듯한 시간이었다. 욱신욱신 쑤시고 저린 통증이 밤낮으로 끈질기게 이어졌다. 개인적인 아픔도 아픔이지만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을 들으며 견디는 일도 만만찮았다. 작가들의 삶이야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활황이나 불황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처지지만, 가벼워진 장바구니에서 가장 먼저 덜어지는 것이 책이나 공연 따위의 문화생활인 바에야 실물경제의 흐름을 비껴갈 도리가 없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파산이며 부도 소식에 가뜩이나 왜소한 어깨가 더욱 움츠러든다. 큰 재난이 닥쳐오면 각자 날아오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이 곤란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점점 차가워지는 대기와 얼어붙은 하늘이 다 원망스럽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권리이기 이전에 의무이기도 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어금니를 질끈 물고 살아갈 이유와 방도를 찾는다. 며칠 전 우연히 펼쳐든 한 권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필연처럼 다가왔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 '얼라이브'의 실제 주인공인 난도 파라도가 사건이 있은 지 30여 년이 지난 후에 '난도의 위대한 귀환'이라는 책을 펴냈다. 영화의 내용대로 그것은 1972년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 추락한 경비행기에서 72일 만에 구출된 생존자들의 경험담이다.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 고산지대의 희박한 공기, 식량이라곤 추락사고와 눈사태로 사망한 가족과 친구의 주검뿐인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영화에서는 처참한 죽음과 인육을 먹으며 버티는 생존자들의 극한 상황이 주요한 이야기로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등산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해발 5000m의 설산을 넘어 구조 요청을 한 파라도는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명확해진 깨달음을 책에서 풀어놓는다. 오로지 삶과 죽음으로 간단해진 인생의 게임에서 턱없이 나약한 벌거숭이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안데스를 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꼭 닮았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슬픔과 우울에 빠져들고, 누군가는 실망하고 포기하며, 누군가는 그래도 싸우겠노라 의지를 곧추세운다.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극악한 상황에서조차 우정과 명예의 원칙을 지키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비관적인 상황에서 가장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섣부른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냉철한 비관주의자라는 사실이다. 질서정연한 세계에 대한 신념으로 구조대를 기다리던 사람은 더 이상 구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자 균형감각과 유연성을 잃고 무너진다. 하지만 끊임없이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들은 마침내 산을 넘어 스스로를 구출한다.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삶이란 치과의사 앞에 앉아 있을 때와 같다. 당신은 언제나 가장 심한 통증이 곧 이어지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통증은 이미 끝나 있을 것이다."

파라도의 마지막 교훈은 이런 것이다. 죽음의 반대는 그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용기도 믿음도 인간의 의지도 아니라고. 죽음의 반대는 '사랑'이란다.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고통과 공포로부터 귀중한 의미를 이끌어내는 단 하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란다. 모호하고 짐짓 '배부른' 것으로 치부되던 사랑이 마지막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막강하다. 삶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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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2 15:43:3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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