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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한국근대미술걸작전

FERRIMAN 2008. 12. 23. 10:28

기사 입력시간 : 2008-12-23 오전 1:23:41
못살아도 정겨운 삶 … ‘근대 자화상’ 만나다
이중섭·박수근·김환기 등 105명 작품 오늘부터 덕수궁서 전시
우리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우리의 초상이다. 덕수궁미술관에 이중섭·박수근·김환기·천경자·오지호·이쾌대·구본웅·김기창 등 근대 미술가 105명의 1910∼60년대 회화·조각·사진 등 232점이 걸렸다. 23일부터 내년 3월 22일까지 열리는 ‘한국근대미술걸작전:근대를 묻다’다.

서양화·사진 등 근대미술을 처음으로 배우면서 ‘장이’에서 ‘화가’로 거듭난 당시 미술가들은 못나고, 못살던 근대의 풍경을 가감없이 그렸다. 국민화가 박수근(1914∼65)의 흙빛 질박한 화폭에는 포대기에 동생을 업어 키운 우리 누이·어머니의 모습이 애잔하고, 이중섭(1916∼56)의 천진한 화폭엔 배곯아 게를 잡아먹어도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고 까르르 웃는 아이들이 다정하다. 두 화가 모두 신산했던 생전과는 대조적으로 최근 몇 년간 미술시장의 반짝 호황을 타고 수십억 원에 작품이 거래돼 ‘블루칩 화가’로 불렸고, 위작 논란에 휘말리는 곤욕도 치렀다.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8∼49, 캔버스에 유채, 72×60㎝ [덕수궁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근대인, 근대의 일상, 근대의 풍경, 근대의 꿈, 근대의 복원 다섯 섹션으로 이뤄졌다. 신문물, 신여성, 지식인, 유학파 화가, 근대식 연애, 근대의 정물화 등 우리의 오늘은 만든 그림 속 수십 년 전 과거를 생생히 되살려보자는 취지다. 월북화가 이쾌대(1913∼65)는 우리 산하를 배경으로 두루마기 휘날리며 팔레트와 붓을 손에 든 지식인 선구자로 자신을 그렸다. 구본웅(1906∼53)은 요절한 식민지 지식인 이상(1910∼37)의 창백한 얼굴을 표현주의적 터치로 그렸다. 식민지·전쟁 등 시대적 고난이 드러난 근대의 일상을 지나면 추상화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의 ‘도시’같은 모던 공간, 따뜻한 고향이 느껴지는 오지호(1905∼82)의 ‘남향집’을 만날 수 있다. 김환기(1913∼74)의 ‘영원의 노래’, 천경자(84)의 ‘목화밭에서’엔 비루한 현실을 넘어보려는 유토피아의 꿈,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좌절된 꿈이 엿보인다.

◆한국 최초의 미술관 건물= 1919년 고종이 눈을 감은 덕수궁은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 얽힌 현장이다. 1909년 완공된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동관에는 고종의 집무실, 접견실, 침실, 왕비의 침실이 있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곳에 황실의 유물을 전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한때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쓰이다가 현재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로 쓰이고 있다.

38년 지은 석조전 서관은 이왕가미술관으로 쓰였다. 미술관 용도로 지은 최초의 건물이다. 73년부터 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다가 10년 전인 9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대미술 기능을 맡은 분관으로 재개관했다.

이번 전시의 넷째 섹션인 ‘근대의 꿈’과 근대 미술품의 보존 수복을 다루는 다섯째 섹션 ‘근대의 복원’은 석조전 동관에서 열린다. 최은주 덕수궁미술관장은 “1938년 미술관 개관 당시의 모습대로 동·서관서 동시에 전시를 열게 돼 당대의 미술관 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개인소장품과 리움, 한국은행 소장품 등 외부에서 150여 점을 대여해왔다. 전시작 중 이중섭이 가족을 그린 은지화, 김기창의 일기형식 화첩 등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때늦은 ‘건국 60주년 기획전’이자 올여름 한철 떠들썩했던 각종 60주년 행사의 마무리다. 전시입장료 무료. 02-757-1800. 

권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