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중앙일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FERRIMAN 2010. 5. 17. 09:10

기사 입력시간 : 2010-05-17 오전 12:25:00
[삶의 향기]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얼마 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있었다. 낮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서, 초저녁이 되어서야 전화를 드렸다.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셨어요?”라고 여쭈었는데, 긴 설명 없이 그저 잘 지내신단다. 특별한 날이니 특별히 재미있게 보내시지 그랬느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오늘이 무슨 날이지?”라고 되물으신다. 두 분 다 결혼기념일을 깜빡하신 거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나,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나 조금은 계면쩍은 웃음을 날리신다. “아직 몇 시간 남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뜻 깊게 보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약간의 돈을 송금했음도 알려 드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축하 전보라도 보낼 걸 그랬다.

부모님은 이제 결혼 51주년을 맞으셨다. ‘내공’이 쌓일 대로 쌓인 부부라서 그런지, 결혼기념일을 깜빡한 것을 두고 누구도 상대를 타박하지 않으며,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는 사실을 크게 아쉬워하시지도 않는 눈치다. 오히려 50년도 더 된 기념일을 기억하고 전화를 걸어준 아들에게 고맙다고 하신다.

사실 부모님이 결혼기념을 ‘열심히’ 챙기는 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결혼기념일을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로 여기고 갖가지 방법으로 자축(自祝)하지만, 부모님 세대는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에는 물론이고 요즘도 그리 흔하지는 않은 ‘금혼식(金婚式)’을 맞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그저 “다 모여서 밥이나 한 번 먹으면 된다”고만 하셨다. 남들 흔히 하는 떠들썩한 ‘잔치’도 싫다 하시고, 예쁘게 차려 입고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도 싫다 하셨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 이유 혹은 핑계였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고민 끝에 우리 4남매는 몇 가지 ‘이벤트’를 준비했다. 감사의 편지 대신 우아한 문구를 돌에 새겨 ‘감사패’를 만들어 드렸고(부모님은 그런 걸 한 번도 못 받아 보셨다), 날짜를 안쪽 면에 새긴 금반지를 두 분께 끼워 드렸고(하필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때였다), 오래된 사진들을 모아서 소박한 영상물도 하나 만들었고(간단한 UCC였지만 부모님은 무척 신기해하셨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해외여행은 거의 못해 보신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여행도 다녀왔다(렌터카 뒷좌석에 앉아서 매우 기뻐하셨다).

“돈 많이 든다”(백 번쯤 말씀하셨다), “안 해도 괜찮다”(쉰 번쯤 말씀하셨다), “그냥 밥이나 한 번 먹자”(스무 번쯤 말씀하셨다) 하시면서도 결국 부모님은 자식들의 ‘강권’을 다 받아들여 주셨고, 꽤나 행복해하셨던 것 같다.

아마 부모님의 관점에선 모두 다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대가 누리고 있는 사치를 생각하면,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다 부모님 세대의 땀과 노력 덕택임을 생각하면 50년 만에 누린 그 작은 행복은 전혀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겨드리면 어떨까. 그날이 없었으면 우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