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중앙일보] 집 나간 며느리

FERRIMAN 2010. 9. 25. 17:26

기사 입력시간 : 2010-09-24 오전 12:19:00
[삶의 향기] 집 나간 며느리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난다. 하다못해 맘에 드는 정수기 점검하는 언니나, 보일러 고치러 오신 아저씨를 위해 떡라면을 끓인 적도 많다. 이런 독특한 취향 때문에 늘 집에 사람들을 불러 밥 해 먹이기를 즐긴다. 정성스레 장만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만 봐도 흐뭇해 하고 사방으로 퍼 돌리기도 좋아하는 성격이다.

이런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집 제사나 명절 음식 장만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노동량으로 친다면야 그보다 더한 손님 초대도 혼자 거뜬히 치러내곤 했건만, 아마 명절 일은 몸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큰 모양이다. 앉아서 커피 마실 틈도 없이 쭈그리고 연방 부침개며 전이며 고기를 지지고 볶다가, 막상 제사 때는 뒤로 물러나서 음식 시중을 들어야 한다. 끝난 후에도 제대로 상에 앉아 먹을 새도 없이 국이며 반찬들을 나른 후, 뒤늦게 한 귀퉁이에서 밥을 후딱 퍼먹다가도 시댁 남자들의 후식을 위해 과일을 깎아야 한다. 제사 주인공이 누군지 얼굴 한번 뵌 적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쯤 되면 요즘 며느리들, 입이 댓 발쯤 삐져나와 구시렁거릴 것이다. 오빠나 남동생 학비 뒷바라지하느라 교육을 중단한 세대도 아니요, 아들만 재산을 물려받을 것도 아니요, 반쪽짜리 사랑 받고 커온 딸도 아닌데. 웃고 떠드는 시집 식구들에게 식혜를 퍼 올리다가 갑자기 친정엄마 생각도 난다. 남편과 내가 부부관계인지 주종관계인지. 고기 굽는 연기가 매운 탓인가. 눈물도 계속 흐른다. 지켜내야 할 전통이라고, 며칠만 참자고 혼자 위로도 해보지만.

여자들의 ‘명절 증후군.’ 힘든 일보다는 상처 받은 자존심 탓이 더 크다. 명절 후에 이혼하는 케이스도 많다던데. 옛날에는 맏며느리가 제사를 물려받을 때 곳간 열쇠와 함께 유산 상속의 권리도 함께 따라왔다. 그에 비해 요즘은 권리 없는 의무만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대가 변한 만큼 맞벌이 부부는 늘고 있는데, 그 신세대 주부에게 전통 운운하며 ‘늘 해오던 방식의 명절 풍습’이 과연 계승될 수 있을까.

인간은 물질이 부족할 때보다 자존감이 결핍될 때 더 상실감을 느낀다고 한다. 4000만원짜리 팔찌를 끼고 하루 종일 손톱 소제나 할 것 같은 ‘제빵왕 김탁구의 전인화’보다, 4000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매끼 식사를 차려내는 ‘인생은 아름다워의 김해숙’이 더 행복해 보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석 연휴에 비를 몇 번 쏟아내더니 완연한 가을 날씨다. 곧 식당들 간판 귀퉁이마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현수막이 내걸릴 것이다. 얼마나 집 나간 며느리를, 아니 집 나간 이유를 하찮게 여겼으면 며느리가 전어 굽는 냄새 맡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 말할까. 그만큼 맛있다는 얘기겠지만. 생선전 부치다 맘 상해 집 나간 며느리들. 구운 전어라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여자들의 자존심에 상처도 주지 않고 열등감도 주지 않으면서, 우리의 전통인 명절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 어디 없을까. 돌아올 설 명절에는 나도 한번 친정 먼저 들렀다가 시댁으로 가볼까 보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