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FOCUS 지난 10월 5일,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영국 맨체스터대의 안드레 가임 교수와 연구원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를 이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에게 영광을 안겨 준 장본인은 ‘그래핀’이라는 신물질. 신소재로 각광받는 그래핀을 최근에는 국내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상온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성균관대 이효영 교수가 주도한 이번 연구는 세계적인 과학 전문지 네이처의 자매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Nature communications)’ 온라인 속보에 게재됐다.
무한한 가능성의 신소재, 그래핀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육각형으로 결합해 벌집 형태를 이루는 화합물이다. 그래핀을 이루는 탄소 원자 하나하나는 이웃한 탄소와 전자 한 쌍 반을 공유하며 결합한다. 한 쌍의 전자가 탄소와 탄소 사이를 견고하게 연결시켜 주는 동안 결합에 참여하지 않은 전자들이 그래핀 내에서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래핀은 실리콘에 비해 100배 이상으로 전자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다. 벌집 모양 덕분에 충격에도 강하다. 그물을 구부리거나 당기면 모양은 변하지만 그물의 연결 상태는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각형 구조의 빈 공간이 완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강도는 강철보다 100배 강하고, 면적의 20%를 늘려도 끄떡 없을 정도로 신축성도 좋다. 더구나 이렇게 구부리거나 늘려도 전기 전도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열 전도도도 금속인 구리의 10배가 넘고, 빛의 98%를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하다.
노벨상을 선뜻 안겨줄 정도로 과학계가 그래핀에 열광하는 까닭은 그래핀의 특성 덕분에 그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반도체 트랜지스터부터 투명하면서도 휘거나 비틀어도 손상되지 않는 터치스크린, 태양전지판 등 각종 전자장치에 이용될 수 있다. 어찌나 용도가 다양한지 이번 노벨상 수상자조차도 그래핀이 보여줄 미래 모습을 다 예상하지 못할 정도다. 또한 그래핀은 다른 물질과 결합도 쉬워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다.
기존 물질의 강도를 대폭 늘릴 수 있는가 하면 전기가 통하지 않던 물질을 전도체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플라스틱에 0.1%의 그래핀만 넣어도 열에 대한 저항을 30%나 늘릴 수 있고 단 1%의 그래핀만 섞어도 전기가 잘 통하는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다. ‘꿈의 신소재’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핀이 특히 각광받는 분야는 반도체다. 기존 반도체 시장은 실리콘 반도체가 9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실리콘은 내구성이 높고 열에 강하며 쉽고 저렴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리콘 반도체는 전자의 이동속도가 느리고 10nm보다 작게 가공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어 개발에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그래핀은 전기전도성이 높아 실리콘 기판에 비해 훨씬 빠른 연산속도의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가공할 수 있고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어 손목에 찰 수 있도록 휘어지는 컴퓨터, 둘둘 말아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전자책, 자유롭게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전자태그, 접어서 보관할 수 있는 스크린 등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전자기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관건은 대량생산
이처럼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그래핀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아직 생소하다. 그래핀 대량생산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시장성 있는 그래핀을 대량생산 하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생산국도 미국이 유일하다. 그래핀 대량생산이 어려운 이유는 현재 알려진 생산방법들의 수율과 품질 균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래핀 생산 방법은 4가지다. 이번 노벨상 수상자인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가 최초로 그래핀을 만들어 낼 때 사용한 셀로판테이프법, 금속 표면에 메탄과 수소를 흘려서 그래핀을 생산하는 화학증착법, 실리콘 카바이드를 한층 한층 쌓아올려 만드는 에피택셜(Epitaxial)법, 산화-환원 반응을 이용한 화학적 방법이 그것. 이 중 흑연의 화학 반응을 이용한 화학적 방법의 시장성이 가장 높다. 실제로 현재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벤처 기업들은 화학적 방법으로 그래핀을 생산한다.
화학적으로 그래핀을 생산하려면 우선 흑연을 강산 처리하여 산화시켜야 한다. 탄소와 산이 반응하면 하이드록시기, 에폭사이드기, 카르복실기, 락톨기 등 탄소에 산소 기능기가 함유된 그래파이트 옥사이드 (Graphite oxide)가 생성된다. 그래파이트 옥사이드는 산소 기능기 때문에 수용액에 분산이 잘 되는데, 이를 원하는 곳에 붙이거나 원하는 패턴으로 변형시킨 후에 환원제를 이용하여 산소를 떼어내면 그래핀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화학적 방법은 적용이 간편하고 대량생산에 유리하지만 다른 방법에 비해 불순물이 많이 남아 그래핀의 순도가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환원제 처리하는 과정에서 환원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황화수소, 하이드라진, 하이드로퀴논, 수산화나트륨, 수산화칼륨, 알루미늄 분말 등 다양한 환원제를 사용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용액뿐 아니라 증기상태에서도 적용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하이드라진을 환원제로 널리 이용하고 있으나 반응 중 100~120℃의 온도를 유지해야 하며 그래핀에 질소불순물이 남는다
이효영 교수 연구팀은 화학적 방법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연구팀은 하이드라진 방법보다 훨씬 더 낮은 상온 (40℃)에서 불순물이 거의 없는 고품질 그래핀을 대량 합성하는 데 성공했으며, 저온인 10℃ 이하에서도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연구팀은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던 환원제인 요오드산-초산(HI-CH3COOH)을 이용했다. 새로운 공정은 기체 상태 반응이 가능함은 물론, 딱딱한 재질뿐 아니라 잘 휘어지는 소재도 만들 수 있다. 또한 생성된 부산물이 쉽게 제거 가능한 물과 요오드뿐이라 고품질 그래핀 생산이 가능하다.
이번 연구결과로 고품질 그래핀을 우리나라에서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팀은 현재 국내특허 출원을 완료하고,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국외특허 출원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기술이전을 계획하고 있다. 이효영 교수는 “그래핀은 실리콘으로는 더 이상 진척이 없던 반도체 정보 처리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줄 뿐만 아니라, 초고속반도체나 고성능 태양전지 개발, 유기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연구로 그래핀 대량생산이 가능해져서 우리나라도 차세대 전자재료산업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라고 연구의의를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