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활동

[중앙일보] 걷기 여행길

FERRIMAN 2014. 6. 19. 18:03

입력 2014.06.13 00:03
 

전쟁 나도 모를 오지, 나비와 길동무하다 산딸기 따먹고 …

[그 길 속 그 이야기] (50) 강원도 인제 둔가리약수숲길

둔가리약수숲길 3구간 미산동길의 중간 지점이 송개교다. 다리 밑으로 내린천이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요즘이다. week&이 강원도 인제의 깊은 숲길을 걷고 온 까닭이다. week&이 걸은 길 이름은 둔가리약수숲길이다.

옛날 어지러운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외진 땅을 이은 길이다. 둔가리약수숲길은 2010년 북부지방산림청이 조성한 길로 현재 4개 구간(45㎞)이 있다.

이 중에서 3구간 미산동길(12㎞)을 골랐다. 내린천과 방태천을 따라 방태산(1444m) 서쪽 기슭을 훑는 길에서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늙은 나무와 웃자란 풀, 풀숲의 벌레와 냇물의 물고기를 만났다. 울창한 숲을 헤집고 다닌 반나절만이라도 번다한 세상을 잊을 수 있었다.

1 송개동 부근에 다다르면 나무 판자로 덮인 수로 위를 걷는다. 2 농수로를 따라 걷는 길. 3 노랑턱멧새가 둥지에 새끼를 품고 있다. 4 빨갛게 익은 산딸기는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삼둔사가리 전설

둔가리약수숲길의 ‘둔가리’가 궁금했다. 둔가리는 삼둔사가리의 줄임말로, 삼둔사가리는 3개의 둔과 4개의 가리를 합쳐 만든 말이다. 방태산 남쪽 내린천 상류에 있는 살둔·월둔·달둔과, 방태산 북쪽 방태천 계곡에 위치한 적가리·아침가리·연가리 그리고 방태산 동쪽에 있는 명지가리를 묶어 이르는 말이다. 둔과 가리는 순우리말로 각각 사람이 살 수 있는 둔덕과 계곡을 뜻한다.

말하자면 삼둔사가리는 방태산 인근의 지명이란 뜻인데 그저 깊은 산골만 뜻하지는 않는다. 인제군청 윤형준(45) 학예사는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삼둔사가리를 난을 피하는 곳, ‘비장처(秘藏處)’라고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삼둔사가리는 난을 피해 몰래 숨어서 살 수 있는 7곳을 가리킨다.

이름을 뜯어보면 이해가 쉽다. 아침가리는 아침에만 잠깐 해가 든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그만큼 깊은 계곡이란 뜻이다. 온갖 난리를 피해 숨어든 사람은 “여기면 살 수 있겠다”는 뜻에서 ‘살둔’이라 불렀다. 7곳 모두 비슷한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예전에는 삼둔사가리 곳곳에 피난 굴도 있었다고 한다. 삼둔사가리를 ‘조선의 마지막 피난처’라 부르는 이유다. 누가 언제 이 땅으로 숨어들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전쟁이 나고 세상이 바뀌어도 모를 만큼 오지인 건 분명하다.

1960년대 삼둔사가리로 가는 유일한 길은 좁은 비포장 도로였다. 75년 군사도로가 생겼고 84년 목재회사가 이곳의 나무를 내다 팔면서 아스파트로 포장된 번듯한 도로가 생겼다. 지금의 446번 지방도로다. 이 도로가 내린천 상류 일대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삼둔사가리에서 따온 길이지만 둔가리약수숲길은 삼둔사가리를 직접 거치지 않는다. “산 깊은 곳까지 길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내린천 줄기를 따라 방태산 자락을 반 바퀴 둘러가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4년 전 길을 낸 뒤 지금껏 관리해온 북부지방산림청 송동현(42) 주임이 말했다. 그는 “길이 지나는 숲과 계곡도 삼둔사가리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앞장섰다.

방태산 깊은 산골

3구간 미산동길은 인제군 상남면에 있다. 하남리 미기교에서 미산리 개인약수교까지다. 후평동∼송개동∼왕성동∼미산동 마을을 차례로 지났다.

후평동은 정갈한 논이 인상적이었다. 주민 84명이 20㎡(약 6만 평) 논에 벼를 심고 살고 있었다. “일흔 살 넘은 어르신이 많아요. 수익은 밭농사가 더 낫지만 워낙 손이 많이 가서 대부분 논농사를 지으시죠.” 이상규(50) 이장이 말했다. 논농사는 물이 중요하다. 내린천이 바로 옆에 있으니 문제없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펌프를 돌려 물을 퍼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쌀 다 팔아도 전기요금을 못 낸다”는 답이 돌아왔다. 후평동에서는 옛날 조상이 파놓은 농수로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면 농수로부터 만들었대. 집마다 사내 한 명씩 나와 돌을 나르고 수로를 냈지. 날을 정해서 수시로 보수하고 가꾼 게 지금까지 내려온 거야.”

이장은 “수로가 콘크리트로 포장된 건 30여 년 전”이라고 말했다. 송개동 부근 내린천에서 시작한 수로는 후평동을 지나 이웃 마을 미기동까지 약 8㎞나 이어졌다.

후평동을 통과하고 숲에 들었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어 비밀의 정원 같았다. 하얀 찔레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늘이 드리워진 나무 터널을 사뿐히 걸어나갔다.

“자, 이제부터 물 위를 걷게 됩니다.” 앞서가던 송 주임이 수로 위로 올라갔다. 공간이 좁아 수로에 콘크리트로 얹어 그 위를 지나게 한 것이다. 내린천 건너로 자동차가 가끔 지나갔지만 우렁찬 계곡물 소리에 묻혔다.

송개동은 마을이라기보다는 펜션 9채가 모여 있는 펜션단지에 가까웠다. 이 오지까지 외지인이 들어와 펜션을 차리기 시작한 건 10년 전이었다. 미산2리 송규혁(62) 이장은 “80년대 후반 미산계곡이 알려지면서 7가구만 살던 마을에 관광객이 밀려들었다. 밭 일구며 살던 주민들은 외지인에게 땅을 팔고 나갔고 지금은 3가구만 남아 펜션업을 하며 산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6채의 주인은 모두 외지인이다.

길섶에서 만난 멧새 둥지

미산계곡은 메기·꺽지·피라미 등 온갖 민물고기 천지였다. 장어도 심심찮게 잡힌단다. 두메산골에 장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자 산림청 송 주임이 “내가 증인이다. 2012년에 1m나 되는 장어를 잡았는데 10만원에 팔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인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장어 치어방류 사업을 하고 있는데, 소양호에 방류한 것이 물줄기를 따라 내린천 상류 미산계곡까지 올라온 것이란다.

숲에는 신갈나무와 소나무가 대부분이었고 물가에는 버드나무 초록 잎이 그늘을 드리웠다. 생강나무·느릅나무·물푸레나무도 부지런히 광합성 하며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서울에서 마신 미세먼지가 다 빠져나가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송개동과 왕성동 중간 지점에 대궐농원이 있었다. 농장 주인 신장호(69)·안만수(63)씨 내외는 24년 전 이곳에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10가구가 모여 마을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이 부부만 남았다. 노부부는 오미자와 블루베리를 키우며 산다.

대궐농원은 천과 산으로 앞뒤가 막혀 외딴 섬 같았다. 천을 건너 도로로 가려면 40분을 걸어가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해서 할아버지는 20년 전 직접 쇠줄을 설치하고 곤돌라를 매달았다. “여기에선 이게 최신식이야. 이거 타면 3분 만에 강을 건너.” 할아버지가 자랑스레 말했다. 농원 앞에 경운기는 어떻게 들여온 건지 물었다. “겨울에 천이 꽁꽁 얼었을 때 얼음 위를 달려 옮기지.” 할아버지의 미소에 덩달아 웃음이 퍼졌다.

왕성동에 가까워지자 숲이 화려해졌다. 길옆으로 산딸기가 지천이었고 보라색 엉겅퀴와 찔레꽃이 어우러졌다. 산에서는 빨갛게 여문 딸기를 보고 여름이 온 것을 안다. 몇 알 주워 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서 톡톡 터지는 딸기가 시고 달았다.

송 주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풀숲에서 새 둥지를 발견한 것이다. 노랑턱멧새 새끼가 둥지 안에 있었다. 갓 태어났는지 얇은 피부 속 핏줄까지 확연하게 보였다. 기척이 나자 어미가 온 줄 알고 꿈틀댔다. 눈도 못 뜨는 새끼 새는 입만 벌려댔다. 뭉클한 장면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숲은 이렇듯이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었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은 지친 인간에게 아무 말 없이 감동과 위안을 줬다.

대궐농원 주인 신장호씨가 직접 설치한 곤돌라 쇠줄. 여기에 곤돌라를 매달아 타고다닌다.

정보=춘천고속도로 동홍천IC에서 빠진다. 44번 국도∼451번 지방도로∼31번 국도를 차례로 타고 35㎞를 더 가면 인제군 상남면 하남리 미기교에 닿는다. 여기서부터 길이 시작된다. 초입 약 1㎞ 구간 말고는 전부 평평한 숲길이어서 걷기에 편하다.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숲에 들어서면 종종 휴대전화가 끊긴다. 왕성동교부터 개인약수교까지 약 2㎞ 구간은 풀이 무성해 걷기 불편했다. 미산동 마을 주민이 길을 관리하는데, 요즘 농번기라 관리에 소홀했단다. 종점인 개인약수교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상남면으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하루 2번밖에 버스가 서지 않아 콜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상남인제콜택시 070-4715-9266. 인제국유림관리소 산림경영팀 033-460-8036.


‘이달의 추천 길’ 6월의 주제는 ‘치유 숲길’이다. week&이 다녀온 강원도 인제의 둔가리약수숲길 3구간 ‘미산동길’ 등 치유와 숲길을 테마로 한 10개 트레일이 선정됐다. <표 참조>

이번에 선정된 트레일의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개 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 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