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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미국 서부 협곡

FERRIMAN 2014. 6. 19. 18:07

입력 2014.06.13 00:03 / 수정 2014.06.13 13:29
 

[커버스토리] 20억 년 세월이 빚다 경이로운 '신들의 땅'

미국 서부 협곡

































신이 빚은 장관. 미국 서부의 협곡을 마주한 사람은 누구나 이토록 뻔하고 진부한 수사를 입에 담는다. 무신론자라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20억 년 전부터 모래가 쌓이고 바위가 깎이고 땅이 뒤틀려 만들어진 풍경은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어떤 신비한 기운이라도 흐르는 걸까. 이 땅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성지로 여겨졌다. 인디언들은 이 땅을 지키겠다고 피 흘리며 싸웠고, 뉴욕주에서 창시된 모르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가 이 일대를 본거지 삼아 부흥했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며 끊임없이 모여든다.



자동차를 몰고 미국 유타주와 애리조나주 일대 협곡을 헤집고 다녔다. 엿새에 걸친 드라이브 여행은 피곤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한국에 잘 알려진 그랜드 캐니언은 빼고 아치스 국립공원·모뉴먼트 밸리·앤털로프 캐니언 등 아직 한국에 낯선 지역을 돌아다녔다. 아치 모양의 모래바위가 있는가 하면, 벙어리장갑 모양의 바위산도 있었다. 순백의 설산과 벌겋게 달아오른 사막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경이(驚異)롭다기보다 ‘경외(敬畏)로운’ 풍광이었다. 브라이스 캐니언에서 만난 한 네덜란드인이 웃으며 말했다. “미국은 정말 엄청난 나라인 것 같아요. 운전할 때 미치도록 따분한 것만 참을 수 있다면요.” 그녀는 세 달째 혼자 자동차로 미국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핸들을 번갈아 잡을 수 있는 동반자, 그리고 질리지 않는 음악만 있다면 생애 한번쯤은 직접 핸들을 잡고 미국의 협곡으로 향할 일이다. 지구의 태곳적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 서부의 협곡지대를 누비고 다녔다. 유타주와 애리조나주에 펼쳐진 광활한 협곡은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보다 기묘했고 화려했다. 수억 년 전 물과 바람이 빚어낸 풍경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인간의 이야기마저 얹혀 흥미진진하고 극적이었다. 

원형극장을 연상시키는 브라이스 캐니언. 바다 밑에 있던 토사가 융기해 침식과 풍화를 반복하며 수백만 개의 첨탑 모양으로 남았다. joongang.co.kr에서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교과서 자이언·브라이스 국립공원



라스베이거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자동차를 빌려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사막 위에 거짓말처럼 세워진 빛의 도시가 아니었다. 경이로운 풍경의 대자연 속으로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협곡지대가 펼쳐진 유타와 애리조나를 여행하기 전에 알아야 할 단어가 있다. 바로 인디언과 모르몬(Mormon)이다. 이 땅은 유럽에서 백인이 넘어오기 전까지 인디언,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터전이었다. 19세기 들어 이 일대를 접수한 건 모르몬교(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였다. 뉴욕주에서 건너온 모르몬교는 유타를 본거지로 삼았다. 유타주는 지금도 인구의 약 60%가 모르몬교도이어서 ‘모르몬주’라 불리기도 한다.

첫 목적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262㎞ 떨어진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이었다. 19세기 중반 모르몬교도가 처음 발견해 ‘신의 정원’이라고 이름 붙인 협곡이다. 다른 협곡에 비해 극적인 멋은 덜하지만 협곡 사이를 자동차로 달릴 수 있었다. 누르락붉으락 V자 형태로 깎인 암산의 풍모는 화라도 난 것처럼 위압적이었다.

자이언 캐니언에서 135㎞를 달려 브라이스(Bryce) 국립공원에 닿았다. 모르몬교도 애버니즈 브라이스가 발견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브라이스 캐니언에서는 퇴적·융기·풍화 등 교과서에서나 봤던 지질학 용어가 눈앞에 펼쳐졌다. 억겁의 세월 동안 쌓인 모래 중에서 단단한 부분만 남아 후두(Hoodoo)라고 하는 탑 모양을 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보니 수백만 개의 돌탑이 서 있는 모습이 도미노 패를 이리저리 줄지어 세워놓은 것 같았다.

저 신비한 풍광을 멀찍이서만 보고 돌아설 수 없어 협곡을 들어갔다가 나오는 나바호(Navajo) 트레일을 걸었다. 2㎞ 남짓한 길이었지만 해발 2500m 위에 있어 숨이 턱턱 막혔다. 아찔한 낭떠러지를 끼고 돌들의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아치스 국립공원에는 아치 모양의 바위가 2000개 이상 널려 있다. 20m 높이의 델리키트 아치는 유타주를 상징한다.
개선문보다 웅장한 자태 아치스 국립공원



운전대를 잡은 지 이틀째 미국식 운전시스템에 금세 익숙해졌다. 마일(mile)을 킬로미터(㎞)로 바꿔 계산하는 일이나, 좌회전 신호가 거의 없어 헷갈렸던 것 정도만 빼면 어렵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모아브(Moab). 역시 모르몬교도가 성서에서 이름을 빌린 곳으로 아치스 국립공원의 관문이다.

아치스 국립공원에는 바람과 물이 깎아 만든 아치(Arch)가 2000개 이상 널려 있다. 아득한 옛날 콜로라도 고원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생겨난 것들이다. 모양에 따라 더블 아치, 야자수 아치, 부러진 아치 등 종류도 다양하다.

수많은 아치 중에서도 유타를 상징하는 델리키트 아치(Delicate Arch)를 찾아갔다. 유타주의 자동차 번호판이나 우표에 등장하는 친숙한 녀석이다. 델리키트 아치를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주차장과 가까운 전망대에서 멀찍이 바라보거나, 4.8㎞ 길이의 트레일을 걸어 바로 앞까지 가보는 것이다. 전망대에서는 동글동글한 암석이 아치와 함께 도열한 고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억 년 전의 물과 바람이 체스 게임을 하다가 간 듯했다.

델리키트 아치로 가는 트레일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메마른 사막 기후이지만 길섶에 야생화가 피어 있었고, 아이들이 토끼와 도마뱀이 출몰할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 아치에 다다랐다. 파리의 개선문이 이토록 웅장할까. 전망대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기기묘묘한 자태였다. 20m 높이의 아치 밑까지 가봤다. 부러질 듯이 위태해 보였다. 국립공원 측은 더 이상의 풍화를 막기 위해 아치 곳곳에 플라스틱 코팅을 했다고 한다. 정말 감쪽같았다.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놓쳐선 안 될 게 또 있다. 인디언이 곳곳에 그려놓은 벽화다.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 살던 인디언의 흔적이 그려져 있었다.

모뉴먼트 밸리는 국립공원이 아닌 나바호 부족 공원이다. 지금도 골짜기 안쪽 황무지 같은 땅에 약 1500명의 나바호족이 살고 있다.
인디언의 성지 모뉴먼트 밸리



191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달리다 163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족의 성지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로 가는 길이다. 모뉴먼트 밸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소다.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며 질주하는 TV 광고에서 봤고, ‘황야의 무법자’나 ‘스타워즈’ ‘포레스트 검프’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등장했다.

모뉴먼트 밸리는 국립공원이 아니다. 나바호 부족공원이다. 미국 정부가 원주민을 배려한 것 같지만 사연을 알면 슬프다. 1863년 나바호족은 미국에 땅을 뺏기고 500㎞ 거리의 뉴멕시코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5년 뒤 미국 정부는 나바호족에게 사과하고 고향 복귀를 허락했다. 이후 나바호족은 ‘나바호국’이란 반(半)자치정부를 세웠고 대통령도 뽑고 있다. 하나 꼭 세 들어 사는 모양새다. 공원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조악한 공예품을 파는 그들에게서 150년 전 이 땅을 호령했던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모뉴먼트 밸리가 나바호족의 성지라는 건 협곡에 진입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벙어리장갑 모양의 거대한 바위산 세 개가 요새처럼 버티고 있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스타워즈’에서 봤던 우주선이 바위산 사이로 날아다닐 것 같았다. 공원 안쪽에 난 17마일 드라이브 코스로 차를 몰았다. 사막 위를 흙먼지 휘날리며 달리니 황야의 무법자라도 된 듯했다. 종종 말을 타고 질주하는 나바호족도 보였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풍경이었다.

해질 무렵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전망대 식당으로 갔다. 해가 기울면서 시시각각 다른 색 옷으로 갈아입던 바위산은 이내 태양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식당의 음식 맛은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메뉴가 흥미로웠다. ‘나바호 타코’ ‘클린트 이스트우드 치킨’, 이런 식이었다. 술은 없었다. 맥주가 있었지만 알코올이 0%였다. 나바호족이 가장 신성시하는 성지여서라고 했다.

앤털로프 캐니언은 천장이 뚫린 동굴을 연상하면 된다. 그 틈으로 햇빛이 쏟아진다.
물과 바람이 빚은 예술 앤털로프 캐니언



마지막 목적지 페이지(Page)로 향했다. 다시 191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 창밖에는 황량한 애리조나 사막이 펼쳐졌다. 페이지는 애리조나의 대표 관광지다. 메마른 사막에 콜로라도강이 굽이치고 거대한 인공호수 파월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이 풍경만으로도 그림 같은데 여행자를 잡아끄는 곳은 따로 있다. 사진작가들이 생애 한 번은 찍고 싶어 한다는 앤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이다.

앤털로프 캐니언은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관람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한다. 1997년 일어난 홍수에 관광객 11명이 협곡에 갇혀 몰사한 뒤부터다. 앤털로프 캐니언이 지금껏 봐온 협곡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퇴적과 침식, 여기까진 같은데 지금도 여름마다 홍수가 나 독특한 풍광이 연출된다.

다국적 관광객과 트럭을 타고 협곡으로 갔다. 협곡 2개 중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위쪽 코스를 택했다. 폭 3m, 높이 30m의 협곡은 천장이 열린 동굴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빙하에 균열이 생긴 크레바스를 닮았다. 협곡 안쪽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화려한 물결 무늬로 반짝였다. 방금 파도가 일렁이고 지나간 듯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머리 위 좁은 바위 틈에서 햇볕이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4~9월 정오 즈음에만 볼 수 있다는 기막힌 광경이었다.

콜로라도강이 협곡 사이를 말 편자 모양으로 휘감고 흐르는 호스슈 벤드. 애리조나주 북부의 작은 도시, 페이지에 있다.
페이지에서는 호스슈 벤드(Horseshoe bend)도 가봐야 한다. 콜로라도강이 말 편자 모양으로 협곡을 휘감고 흐르는 풍경이 장관이다.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지형과 닮은꼴이었지만 규모는 비교가 안 됐다. 절벽 높이가 300m였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 오금이 저렸다. 객기를 부리다 추락한 관광객도 있었단다. 

여행정보=미국의 유타·애리조나 드라이브 여행은 라스베이거스를 기점으로 삼는 게 좋다. week&은 유나이티드항공(kr.united.com)의 인천∼샌프란시스코∼라스베이거스 노선을 이용했다. 렌터카는 알라모(alamo.co.kr)에서 7인승 미니밴에 한국어 GPS·보험 등이 포함된 ‘골드 패키지’를 선택했다. 7일 이용료 585달러(약 59만원). 알라모 한국사무소에서 전화 상담도 해준다. 02-739-3110. 6일 동안 이동거리는 1750㎞, 기름값은 180달러(약 19만원)가 들었다. 기름값이 한국의 60% 수준이다. 미국에서 운전하려면 국제면허증을 챙겨야 한다. 입장료는 자이언·브라이스 국립공원 25달러(차 1대, 일주일 기준), 아치스 국립공원 10달러(차 1대, 일주일 기준), 모뉴먼트 밸리 20달러(차 1대, 4명까지)다. 앤털로프 캐니언 관람은 웹사이트(antelopecanyon.com)에서 예약하는 게 좋다. 일반 투어 37달러, 사진촬영 투어 82달러. 자세한 미국 여행 정보는 미국관광청 웹사이트 (discoveramerica.co.kr) 참조.

글·사진=최승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