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 터 닦은 불운의 선구자들
최성우의 데자뷔 사이언스(17)
증기기관, 증기선,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문제는 어릴 적에 TV 퀴즈프로그램 등에서 필자도 자주 접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의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증기기관은 와트, 증기선은 풀턴, 증기기관차는 스티븐슨’이라고 답할 것이고,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대부분 그렇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발명, 발견의 역사를 좀 더 엄밀히 살펴보면, 유감스럽게도 셋 다 정답이 아니다.
풀턴보다 앞서서 증기선을 발명했던 피치
발명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제품의 최초 발명자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사실은 ‘사상 처음으로 발명’했다기보다는, 제품의 사업화와 실용적인 보급에 성공하여 이름을 떨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누가 최초로 발명했는가를 밝히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지만, 분명 그보다 앞선 선구자들이 발명에 성공하고도 빛을 보지 못하고 불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예가 적지 않은 것이다.
증기기관은 근대 산업혁명에서 핵심적인 원동력 역할을 획기적인 발명의 하나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증기기관의 최초 발명자는 아니다.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오기 50여년 전에 이미 영국에서는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이 발명한 증기기관이 탄광의 물 퍼내기 작업에 이용되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소머셋(Edward Somerset; 1601-1667)과 세이버리(Thomas Savery; 1650-1715) 등 여러 선구자들이 있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도 증기기관과 비슷한 원조를 찾을 수 있다. 와트는 가장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널리 보급하여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한 인물일 뿐이며, 풀턴(Robert Fulton; 1765-1815)의 증기선과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6)의 증기기관차 역시 마찬가지이다.
풀턴보다 앞서서 증기선을 발명한 선구자들도 여럿이 있으나, 그중 실용화에 가장 다가갔던 인물로서 미국의 존 피치(John Fitch; 1743-1798)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시계공으로 일하면서 산술과 측량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미국 여러 지방을 떠돌며 모험을 좋아하다가 델라웨어에 정착한 후로는 증기선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785년에 증기선의 모형을 만들고, 2년 후인 1787년에는 실물의 제작에도 성공하여 시험운항을 마쳤다. 그의 증기선은 배의 양 옆의 앞뒤에 모두 12개의 노를 달고, 증기기관의 힘으로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피치는 증기선을 더욱 개량하고 회사를 설립하여 여러 곳의 증기선 독점 운행권을 취득하였다. 1790년부터는 델라웨어강에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 사이를 운항하였는데, 그의 증기선은 시속 12km의 속도로서 풀턴의 증기선인 클레어먼트호보다도 빠른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직 승객 등의 수요가 적은 탓이었는지 증기선의 운항은 큰 적자를 보았고, 출자자와 후원자들은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하였고, 보다 훌륭한 증기선으로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자신의 연구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사람들을 찾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1796년에는 세계 최초의 스크루 프로펠러 증기선 개발에도 성공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가난과 절망 속에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피치는, 결국 수면제를 먹고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증기기관차의 선구자 트레비딕
증기기관차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6) 역시 증기기관차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성능 좋은 증기기관차를 개발하고 실용적으로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 성공해서 유명해진 것이다. 특히 아들인 철도기술자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 1803-1859)과 함께 철도 가설사업에 일생을 걸고 매진한 결과, 증기기관차가 기존의 마차를 대체하고 육상교통의 혁명을 불러 온 것이다.
스티븐슨보다 앞서서 증기자동차나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으로는, 퀴뇨와 머독 등을 꼽을 수 있다. 프랑스의 군사기술자 퀴뇨(Nicolas Joseph Cugnot; 1725-1804)는 삼륜 증기자동차를 발명했으나, 시험운행에서 충돌사고를 일으켜 동승했던 고위 군인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영국의 머독(William Murdock; 1754-1839)은 제임스 와트가 동업자와 함께 설립한 볼튼-와트 상회에서 일하였는데, 증기기관차 모형의 제작에는 성공했으나 회사의 상사였던 와트의 반대로 더 이상 발명을 진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실용적인 증기기관차를 처음 발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와트, 머독과 같은 영국 사람인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k; 1771-1833)이라고 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는 콘월 주석광산에서 증기기관의 기사로 일하면서, 사람이 타고 달릴 수 있는 노상증기기관차의 발명에 착수하였다. 그는 와트의 방식과는 달리 고압증기를 이용한 증기기관을 설계하였고, 마을의 대장간에서 조립하여 6명 이상이 탈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성공적으로 제작하였다.
180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트레비딕은 친구들과 함께 증기기관차의 시운전을 하였는데, 같이 탔던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도 하였으나 증기기관차는 험한 비탈길을 별 사고 없이 잘 달렸다. 이듬해에 그는 다른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특허를 취득하였고, 이를 계기로 상업적인 운행에도 나섰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804년에 제철소의 레일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운행했으나 레일이 기관차와 화물의 중량을 이기지 못했고 무너졌다. 1808년에는 런던에서 승객들로부터 요금을 받고 증기기관차를 운행하기도 하였으나 기관차의 전복사고 이후 사람들이 외면하는 등, 증기기관차의 실용화는 발명자의 의도만큼 따라주지 못했다. 트레비딕은 크게 실망하여 남아메리카로 이주하여 광산기술자로 일했으나, 그곳에서도 하는 일이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 온 후 그는 고향의 빈민구제시설에서 보호를 받다가 1833년에 불행한 삶을 마쳤다.
1932년에는 그의 증기기관차가 처음 달렸던 언덕 부근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설립되어, ‘불운했던 증기기관차의 발명자’의 업적을 기렸고, 아직도 영국에서는 스티븐슨보다 트레비딕을 증기기관차의 아버지로 꼽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풀턴, 스티븐슨보다 증기선, 증기기관차를 발명했던 여러 사람들이, 실용화에 실패하고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간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의 발명품의 성능이 사람들이 실용적으로 이용하기에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는 그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만한 시대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풀턴과 스티븐슨의 성공도 결국은 그들의 선구적인 노력과 연구를 바탕으로 가능했을 것이며, 그들의 희생과 시행착오가 후세의 발달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최성우 과학저술가
- 저작권자 2016.02.19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