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실험과학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정교한 실험장비구축이다. 안정적인 실험시설과 시스템의 구축은 성공의 열쇠가 된다. 최근 기초과학분야의 발전과 복잡성의 증대로 인해서 과학자들은 실험 장비를 최적화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과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지난 2017년 우주의 중력파를 발견하여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연구 이면에는 25년 동안 구축한 거대한 중력파 관측시설인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와 일천여 명의 과학자들이 있었다. 만일 이렇게 공들여 쌓아놓은 실험장비들을 하루아침에 해체해야 한다면 연구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시간을 2년 전으로 돌려보자. 2017년 10월 포스텍의 융합생명학과 교수였던 한 과학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면역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은 찰스 서 교수였다.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에서 신체를 방어하는 면역체계의 핵심인 T세포의 탄생과 성장, 소멸과정을 규명하여 면역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은 그는 2012년 한국에서 면역학의 도약을 위해 포스텍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정부는 기초과학분야를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지원방안을 마련한다. 기존의 단기 연구프로젝트 중심의 지원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연구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기초과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기초과학연구원 (IBS)이 설립되었다. 찰스 서 교수는 포스텍에서 IBR 면역미생물 공생연구단을 이끌었다. 이 연구단엔 48명에 이르는 우수한 연구자들이 모여들었고 면역학 분야의 새로운 메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충만했다.
찰스 서(1961-2017). [사진 기초과학연구원]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몸속에 퍼지고 있던 암세포는 위대한 과학자의 삶을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면역학계의 큰 손실이기도 했다. 세계적 학술지인 ‘네이쳐’와 ‘미국 면역학회’는 앞 다투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문제는 그를 잃은 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65억원이 들어간 실험장비와 연구단의 해체를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를 따르던 이 분야의 최고 연구자들과 면역학에 꿈을 갖고 연구자의 삶을 시작한 새내기 대학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찰스 서를 대체할 수 있는 연구단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연구단 폐쇄의 이유였다. 한 과학자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전체 연구단의 비극이 되고 말았다. 현대 과학은 단순히 한 명의 천재 과학자가 모든 연구를 수행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일단 안정적인 실험시스템이 구축되면 그 안의 과학자들이 획기적 실험결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높아진다.
사실 연구자들에게 그동안 땀 흘려 구축해놓은 실험시설이며 실험동물들을 회수한다는 것은 군인들에게서 총을 빼앗고 전쟁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영국의 왕립학회나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의 마련을 위해 설치된 연구원이다. 기초과학의 성공여부는 연구지원의 장기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한 실험체계의 구축에 있다. 한 명의 과학자의 명성에 매달리기보다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방식이 필수적이다. 1918년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영국정부는 국가가 지원하는 기초연구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리권한을 과학자들에게 양도하는 홀데인 원칙 (Haldane Principle)을 발표했다. 연구비의 안정적 지원과 과학자들이 관리하는 연구위원회는 이후 영국의 기초과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초과학의 비약적 발전은 안정적 연구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한 세계적 과학자의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뼈아픈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기흥 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