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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

FERRIMAN 2008. 2. 1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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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2006-04-12 23:36:43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
 멘델레예프는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1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고등학교의 교장이었으나 멘델레예프가 태어날 때쯤 눈이 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교장직을 사임하자 어머니는 유리공장을 재개업하여 수입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경영하던 유리공장마저 화재를 당하자 그의 나이 15세 때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코바에 가서 모스코바 대학에 입학시키려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St. Petersburg까지 가서 그곳의 사범대학(아버지의 모교) 이학부에 들어가서 화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얼마되지 않아서 그의 모친이 죽었다. 1855년에 졸업한 멘델레예프는 일년간 크리미아 지방에서 교직 생활을 한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서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그의 용액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아서 1859년에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파리로 가서 레노(Regnault)의 지도를 받고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 가서 분젠과 키르히호프의 지도를 받았다. 1860년 그가 하이델베르크에 머무르던 시절에 열린 Karlsruhe Congress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주기율표에 대한 어떤 영감을 최초로 받았다고 한다. 1861년 St. Petersburg에 돌아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곧 고등공업학교 화학교수가 되었다. 1867년에 대학강의용 교과서로서 "화학의 기초"를 출판하였고 1871년에 제2권을 출판하여 유명해졌다. 이 책들은 1891년에 영어로, 1892년에 독어로, 1896년에 불어로 번역되어 많은 화학도들이 읽게 되었다. 1869년에 "원소의 원자량과 그 성질과의 관계"라는 논문을 러시아 화학회에서 발표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학생에게 대하여 어떤 장벽도 만들지 않았으며 학생들도 그를 친구와 같이 편하게 대하였다. 러시아 제국시대라서 대학에서는 관헌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멘델레예프는 항상 학생의 변호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래서 1890년에 교수직에서 해임당하였다. 1892년에 도량형국장으로 취임하여서 죽을 때까지 그직을 수행하였다.
실제로 멘델레예프는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많은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는 정치 사상 때문에 두 번이나 교육부 장관과 다투었으며, 이혼 후 러시아 법(이혼 후 7년 안에 재혼 금지)에 따르지 않고 재혼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주기율표와 러시아 화학공업에 미친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왕립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1955년 그의 업적을 기려서 101번 원소의 이름을 멘델레븀(Md)으로 정하게 되었다.
화학에서 주기율표는 물리학에서의 Newton의 업적, 생물학에서의 Darwin의 업적과 같은 것으로 화학을 체계화하여서 과학의 진보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온 것이다. (M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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