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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풍요로운 노후를 원하면서도 아직 준비가 안 된 회사원 박모(40)씨와 증권사를 찾아가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60세에 은퇴해 80세까지 월 430만원을 쓰려면 은퇴 시점에 14억원을 쥐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과 월 30만원씩 넣는 개인연금에 희망을 걸었던 그로선 지금부터 한 달에 172만원씩 더 투자해야(연 8% 수익률 가정) 만질 수 있는 돈이다. 월급 400만원에 생활비며 교육비를 빼면 저축할 돈이 거의 없는 박씨로선 ‘악’ 소리가 날 법하다.
씀씀이를 줄이고 국내여행과 등산·영화관람에 만족하면 월 250만원으로도 충분하지만 박씨의 입에선 “그렇게 살긴 싫다”고 볼멘소리가 나왔다.
박씨처럼 준비는 헐렁한데 꿈은 큰 ‘이율배반적’ 상황이 노후대비 현주소다. 이는 통계로 확인된다. 푸르덴셜투자증권이 최근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6대 도시의 600명을 조사했더니 10명 중 5명은 “노후준비가 애초 계획보다 잘 안 되고 있다”며 한숨지었다. 그러나 “노후자금이 부족하지 않도록 할 자신이 있다”고 답한 사람도 10명 중 6명이었다. 준비 상황에 비해 지나친 자신감이다.
금액에 대한 감(感)도 약하다. 50~64세 응답자는 은퇴 시점(65세)에 총 3억3000만원을 마련하면 족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돈은 13년치 생활비밖에 안 된다. 기대수명을 감안하면 7년은 굶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맞춤형 실버 드레스
기자는 얼마 전 서울 서소문의 A은행에 찾아가 4개 펀드에 가입했다. 길게 보고 묻어두려고, 미리 찍어둔 펀드를 주문했다. 시장이 출렁거려 투자자들이 불안할 때였지만 직원은 별 설명 없이 일사천리로 통장을 만들어줬다. 그 몇 주 뒤의 어느 날 창구 분위기를 취재하려고 서울 목동의 B증권사 지점에 손님 행세를 하고 찾아갔다. 직원은 여러 펀드를 늘어놓으며 장단점을 장황하게 소개했지만 뭔가 부족했다.
그리고 27일 푸르덴셜투자증권 대치동 지점. 최근 개발돼 투자자 사이에서 슬슬 입소문이 도는 ‘푸르락 자산관리’시스템을 시연해 보러 갔다.<그래픽 참조> 은행 프라이빗뱅킹(PB) 못지않은 인테리어의 상담실에 들어서자 박진희 차장이 반갑게 맞아줬다.
그는 접혀 있던 듀얼 모니터부터 폈다. 직원 맞은편에 앉은 고객이 화면 속 내용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돼 있었다. 박 차장은 대뜸 “은퇴 설계용이냐, 아니면 교육이나 주택 구입용 자금이냐”며 목표부터 물었다. 일단 ‘노후준비’라고 답했다. 현재 나이를 41세로 설정하고 은퇴 시점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평균치인 62세로 잡은 뒤 85세까지 돈을 쓴다고 가정했다. 다음은 주머니 속이 어떤지 청진기를 댈 차례. 금융자산이 6000만원 있는데, 예금 5000만원과 펀드 1000만원을 굴린다고 상정했다. 개인연금도 월 50만원씩 10년간 넣는다고 했다.
이제 원하는 노후를 고르는 순서가 됐다. 기본생활비·의료비·여가생활비 등을 포함한 씀씀이 수위를 택하라고 했다. 통계청의 소득 기준에 따라 분류된 ‘Best(상위 20%), Better(20~40%), Good(40~60%)’ 중에서 Best를 골랐다. 중앙SUNDAY의 계산과 비슷하게 월 435만원을 쓰는 느긋한 노후다.
프로그램을 돌리니 62세에 14억5000만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예금과 국민연금, 개인연금, 각종 연금을 활용해도 6억7000만원이 모자란다. 이 돈을 마련하는 게 노후 목표로 떠오른 것이다.
최선의 전술은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좋은 펀드를 두루 공략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선 질문지를 작성해 손님의 투자 성향을 5등급으로 파악한다. 1등급인 ‘적극 자산배분형’을 골랐다. 위험을 적극 떠안으면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스타일이다. 푸르락 시스템은 국내외의 질 좋은 100여 개 펀드를 분석해 5등급 투자 성향에 맞춰 상품 꾸러미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제 최종 해법이 나왔다. 별 볼일 없는 예금 5000만원을 털어 미래에셋 인디펜던스 펀드(60%), 피델리티 태평양 펀드(30%), 푸르덴셜 채권혼합형 펀드(5%), 프랭클린 뮤추얼 비이컨 펀드(5%) 등에 장기 분산투자하면 부족분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 취향에 따라 각종 연금 상품을 더할 수도 있다.
굳이 푸르락을 길게 소개한 건 ‘과학적 노후 설계’의 모범답안을 세밀화처럼 그려주는, 업계에서 드문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목표 설정→주머니 파악→투자 성향 진단→펀드 바구니 선택→투자’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노후는 찬란한 은빛이 아니라 잿빛으로 변한다.
내 몫을 챙겨라
노후 준비에 성공하려면 컴퓨터 앞에 앉기 전에 미리 새겨둘 게 있다. 한국재무설계의 이충구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는 “먼저 ‘내 몫’을 챙기라”고 힘줘 말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녀들은 부모가 스스로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식을 노후자산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직도 적잖다”는 것이다. 그는 “주머니가 빠듯해도 수익의 10%가량을 없는 셈치고 20~30년 금융상품에 투자하라”고 했다.
충격 요법도 좋다. 은퇴자금을 직접 뽑아보고, 얼마나 준비가 덜 됐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재무설계업체인 머니트리의 정일권 이사는 ‘지연의 비용(cost of delay)’을 얘기했다. 10% 수익률로 20억원을 만들 때 35세에 시작하면 월 150만원의 투자금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40세엔 260만원, 50세엔 1000만원이 든다.
물론 돈만 준비됐다고 노후에 콧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다. 정일권 이사는 “은퇴를 퇴직 이후의 ‘경제적 사건’으로만 보는 건 낡은 시각”이라며 “특히 수명이 길어지면서 일을 통한 성취감, 사회참여 같은 심리적 해법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사회보장 연령을 65세로 잡은 것은 대공황 이후 1935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60대 이후에도 20년은 더 살아야 하고, 일 없이 심심하게 보내는 노후는 행복하지 않다. ‘노후=돈+일’이란 방정식을 짜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