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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공병우 3벌식 한글 타자기

FERRIMAN 2008. 8. 27. 08:53

전쟁 중에도 과학기술이 꽃을 피우다 ‘공 박사 3벌식 타자기’ 미국서 시제품 생산 2008년 08월 27일(수)
지난 60년 간 대한민국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던 시대에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이 같은 성장 이면에는 발전의 원동력이 된 과학기술이 있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건국 60주년의 해를 맞아 STEPI 등 관계 기관과 협력,1948년 헌법제정 이후 지나온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아본다. [편집자 註]

건국 60년 과학기술 6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국내에서는 한국 과학기술사에 있어 길이 남을 놀라운 업적이 성취되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평생을 한글타자기 개발에 바친 공병우 박사. 3벌식 ‘공 속도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1938년부터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 ‘공안과 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공 박사는 1943년 일본어로 된 ‘소안과학’이란 저서를 한글판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손으로 정서하는 것이 너무도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곧 거리로 달려가 미국에서 제작한 타자가 두 대를 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새로 구입한 타자기 역시 5벌식이어서 손으로 쓰는 것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타자기를 분해해 한국 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자판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을 좌우한 ‘한국기계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 공병우 박사. 
공 박사는 1949년 ‘3벌식 타자기’를 설계한다. 그리고 1950년 초 그 설계도면을 미국의 타자기 제조회사인 ‘언더우드’에 보냈는데, 언더우드 측에서 이 설계도면을 받아들였다. 한글전용 타자기 첫 시제품을 생산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일로 공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 특허를 받아낸 한국의 타자기 발명가로 기록됐다. 또한 향후 ‘공병우 타자기’를 생산, 국내에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3벌식 타자기는 한글의 구성 원리를 받아들여 첫소리, 가운데소리, 끝소리를 하나로 모아 쓰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와 같은 소리글자이면서도 풀어쓰는 것이 아니라 모아쓰는 방식의 한글 표기법을 타자기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5벌식 타자기로 불편을 느끼고 있었던 국민들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미군들이 쓰던 영문타자기가 겨우 선보이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공 박사가 만든 ‘한글을 찍어내는 기계’는 한글학자들과 식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한국에 컴퓨터 자판이 보급되기까지 한글 타자기 하면 공병우 타자기라는 공식이 한국인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과학기술계 역시 공병우 타자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지난 1998년 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정책연구소(STEPI)가 산.학.연 전문가 22명을 대상으로 건국 후 과학기술분야 업적 50선을 선정한 결과에 따르면 공병우 박사의 3벌식 타자기 개발을 한국 과학기술사에 있어 첫 번째 업적으로 올려놓고 있다.

▲ 언더우드란 상표로 출시된 공병우 타자기. 
공 박사가 개발한 3벌식 타자기는 전쟁 중 공 박사를 살려낸 업적이기도 했다. 6.25가 터진 후 공 박사는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공 박사가 인민위원장에게 자신이 개발한 타자기를 보여주자 인민위원장은 공 박사를 감형하고, 북한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납북된 공 박사는 국군의 북한 점령으로 혼란된 틈을 이용해 극적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한글기계화 운동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전념하게 되는데,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 중에 과학기술인의 의지가 꽃을 피운 한국 과학기술사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 박사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가 부산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는 치열한 전쟁으로 일제가 남겨준 얼마 안 되는 연구소 등 국내 과학기술계 소중한 재산들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연구소, 또는 대학 소속의 과학기술인들 역시 갈 곳을 잃고,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혼란 속에서도 피난지인 부산 대신동 주변에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당시 대선발효(주)가 각 대학 화학 및 화공과 학생 실습을 위한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대선발효는 회사 내 공지에 화학실험실 건물을 신축하고, 시약 실험기기 일부를 제공하는 등 당시 부산에 가교사(假校舍)를 개설했던 대학 화학과 화공과 학생들을 위한 공동 실험실을 마련해주었는데, 실험실을 찾는 학생 중에는 서울대 화학과와 화공과, 이화여대 화학과 학생들이 포함돼 있었다.

대한화학회는 25년사를 통해 이 실험실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장차 이 나라의 화학, 화공학계를 짊어질 역군들의 훈련과 협동의 도장이 되고, 학문 대화의 광장으로 이바지했는데, 우리나라 화학교육사에 있어 길이 빛날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과학교육사에 있어서도 길이 빛날”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8.08.2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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