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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어떻게 죽고 싶으세요?

FERRIMAN 2008. 12. 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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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고 싶으세요?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 제91호 | 20081207 입력
동양에서는 가장 행복한 인생을 두고 흔히 ‘오복(五福)을 누린다’고 한다. 오복의 내용은 출전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서경』에 등장하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오래 살고, 재산이 많고, 건강하고,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고,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그중 특히 어려운 것이 ‘고종명’, 즉 ‘잘 죽기’다.

누구나 한번쯤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늘 죽음을 접하는 의사들은 더 그렇다. 그런데 아는 게 병이라고, 의사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 더 마음이 복잡해진다. 심장병으로 죽는 건 이래서 싫고, 암으로 죽는 건 저래서 싫고, 뇌졸중으로 죽는 건 또 다른 이유로 싫다.

어느 날 갑자기 급사하는 것은 너무 허무해 싫고, 만성질환으로 오래 앓다가 죽는 건 더 싫다. 그래서 의사끼리 모인 자리에서 이런 화제가 오르면 ‘말년에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길에(떠나는 길에는 말고)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결론에 흔히 이른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사실 과거에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는 달라졌다. 의학의 발달로 본인이나 가족의 선택에 따라 ‘죽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게 되어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존엄사’ 논쟁이다. 최근 서울지법이 존엄사를 허용하는 첫 판결을 내림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논란 가운데 상당 부분은 존엄사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불필요한 공방이다.

존엄사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는 것’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소생 불가능한 말기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나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하지 않고 통증 관리 등 최소한의 치료만 제공하여 환자가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 안락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소극적 안락사와도 다른 것이다. 넓은 의미의 소극적 안락사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소생 불가능’하고 ‘사망이 임박한’ 경우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고통이나 절망으로 생을 포기하는 일반적인 소극적 안락사와는 확실히 다르다. 또한 어떤 경우에든 환자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뇌사 인정 여부와도 별개 문제다.

물론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합리적 우려도 있다. 가족들이 경제적 동기 등으로 환자 본인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그것이다.

생명 연장 치료를 두고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은 제3자의 시각일 뿐 환자 본인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 본인의 뜻이다.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 소위 ‘사전 의사결정서(advance directive)’다. 이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수많은 주사, 모니터 장치와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며칠을 더 살 것인지, ‘조용히’ 며칠 먼저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 놓는 문서다. 최근의 사건이 법원에까지 간 것도 환자 본인의 뜻을 확인할 방법이 가족들의 증언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사전 의사결정서 작성이 보편화되어 있다. 아예 그 양식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나라도 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리도 존엄사와 관련된 여러 사항이 제도화되어야 하고, 사전 의사결정서를 작성하는 문화가 생겨야 한다. 그래야 환자 본인은 오복 중 하나를 누릴 수 있고, 가족과 사회는 연명 치료에 따르는 심리적·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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