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과 경제

[중앙일보] 고용불안시대의 나홀로 사장님, 1인 기업

FERRIMAN 2008. 8. 20. 09:58
기사 입력시간 : 2008-08-20 오전 2:23:30
고용불안 시대 … 아이디어 앞세운 ‘나홀로 사장님’ 뜬다
1인 기업 “폼 안 나도 애쓴 만큼 거둬”
적은 비용·리스크도 강점
‘1인 기업가’ 김혜주 알텐데북스 대표가 19일 책이 수북이 쌓인 자신의 집이자 사무실인 서울 옥수동 자택 책상에 앉아 거래처에서 보내온 팩스를 검토하느라 분주하다. [사진=김성룡 기자]
“아직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어쩌면 세 번째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2007년 9월 21일)

“13일 세 번째 기도수술을 했어요. 이렇게 있다가는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 시작했던 와인책 출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2007년 12월 30일)

“살기 위해, 제가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도전해 볼 수 있던 일이었어요. 딴생각 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자체로 모든 걸 보상받은 느낌입니다.”(올해 1월 1일)

아이디어만 있으면, 전문지식만 있다면 돈 버는 길은 있다. 꼭 직원을 둘 필요는 없다. 신체 장애도 장애가 아니다. 호텔리어를 거쳐 와인 유통회사를 다니다가 2년 전 화재 연기에 질식해 지금도 목소리 재활 치료 중인 김혜주(35)씨. 그는 알텐데북스라는 회사의 사장이자 말단 대리이며 영업사원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지만 자신의 와인 주특기를 살려 지난해 10월 와인 전문 출판사를 차린 것이다. 아직은 목소리가 온전치 않아 자택 겸 사무실에서 e-메일로 거래처와 소통하며 일을 한다. 3월 내놓은 첫 야심작은 『전설의 100대 와인』이라는 번역서. 전설처럼 재미난 이야기가 담긴 12개국 와인을 생생하게 엮었다. 출간 한 달 만에 2쇄를 찍어 제작 원가를 모두 뽑았다.

동네 음식점이나 수퍼처럼 가족이나 일용직이 동원돼야 하는 노동집약적 생계형 창업이 아니다. 김 사장처럼 아이디어와 경험·전문성을 무기로 내세운 ‘창조형 1인 기업’이 각광받고 있다. 우선 사회적으로는 일자리 부족의 타개책이다. 경기 예측이 어렵고 사업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요즘 가벼운 몸집으로 민첩하게 뛸 수 있다는 이점도 크다. 미국은 전체 기업에서 1인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육박한 반면 우리나라는 40%에 불과해 1인 기업 형태의 창업이 늘어날 여지가 크다.

때마침 한나라당의 임태희 정책위의장은 이달 들어 ‘1인 창조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품목에 대한 부가가치세와 중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한 세 부담을 완화하겠다고 발표한 자리에서다. 그는 “창의성과 전문지식은 있지만 돈이 없어 기회를 얻지 못하는 인재가 많다. 이런 계층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1인 창조기업’ 육성에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회사 형태지만 최소 자본금을 줄여 줌으로써 좋은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기 쉬운 사회 인프라를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애쓴 만큼 가져간다=서울 노원구에서 실내환경 개선사업 에코미스트를 운영하는 임경환(47)씨는 혼자서 고객 주문을 접수하고 회계관리를 한다. 직원이 없다 보니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대신 수입은 전부 자신의 몫이다. 월평균 1000만원 매출에 500만원가량이 순익으로 떨어진다. 그는 10여 년간 보험회사에서 법인영업을 하다가 1998년 퇴직했다. 그 후 2004년 에코미스트를 창업하기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다. 치킨 전문점, 의료기기 판매 등 열 가지가 넘는 일에 손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종자돈이 넉넉지 않은 처지에서 ‘혼자 하는 소박한 사업 아이템이 없을까’ 고심하다가, 의료기기 판매를 하면서 알게 된 병원 거래처를 통해 실내환경 개선사업에 눈을 뜨게 됐다.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정종문(50)씨는 2006년 1250만원을 들여 무점포 잉크 충전회사 잉크가이를 세웠다. 주 고객은 관공서와 건설회사다. 납품과 고객 서비스 업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스스로 관리한다. 20년간 전자업체에서 잔뼈가 굵은지라 고객의 프린터와 복사기쯤은 공짜로 턱턱 수리해 줘 칭송이 자자하다. 한 달 평균 매출은 1500만원. 그는 “ 번듯한 기업의 봉급 사장보다 폼은 나지 않지만 땀 흘린 만큼 벌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김혜주 사장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변화 대처에 빠르며 ^다시 취직하더라도 기업 운영 경험을 살릴 수 있고 ^운영이 잘되면 일반 기업보다 개인 수입이 짭짤하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혼자 활동할 경우 자기 관리에 소홀하기 쉽다는 걸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김 사장은 “일반 기업과 사업을 벌일 때 회사 대 회사 간 협상을 한다는 점을 당당히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강병오 FC창업코리아 대표는 “창업 비용과 리스크가 적은 1인 기업 창업이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프로정신을 갖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특화해 좀 더 전문적이고 고객에 밀착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아무리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라 해도 생소한 분야는 곤란하다. 그럴 경우 최소한 1~2년의 준비 기간을 두라”고 했다.

◇국책사업으로 지원=정부의 1인 기업 활성화 움직임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 이후 실업자가 눈덩이처럼 늘자 2000년 ‘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창업진흥책이 신설됐다. 주식회사 설립 때 발기인이 한 명이어도 되고, 자본금이 5000만원에 미치지 못해도 된다는 내용이다. 1인 기업이 설 땅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국내에는 1인 벤처기업·온라인쇼핑몰이 속속 등장했다. 임태희 의장이 최근 지원하겠다고 한 것은 이런 추세에 가속을 붙이겠다는 뜻이다. 구체적 지원 방안은 5월 발족한 미래기획위원회가 중심이 돼 강구하고 있다.

정부는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을 올 국회에서 꼭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최저 자본금제도를 아예 폐지해 일본처럼 단돈 1원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또 법인 설립 절차를 집에서도 온라인으로 쉽게 밟을 수 있는 ‘재택 창업 시스템’도 도입하기로 했다. 여기에 저작권(아이디어)을 온라인을 통해 사고파는 방안까지 마련 중이다.  

글=정선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